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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편지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

by 안규수 2016. 7. 2.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저는 하노이에서 아침을 맞고 있습니다.

어제는 비가 와서인 지 그리 많이 덥지는 않은 듯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어려운 때를 지나가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즈음 깨닫는 것은 이 순간들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 그리고

"이 땅에서의 하나님과 친밀한 동행" ...

이것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둘만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시겠지요.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이기에~

가장 큰 선물이기에~

가장 좋은 것이기에~


우리의 영적인 눈이 띄여지길 소망하는 아침입니다.

'아픔은 겪는 것이 아니라 아픔은 살아지는 것'이라는 어떤 분의 표현이 깊이 와 닿는 아침입니다. ^0^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멋진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 아침은 김상권님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왜 가룟 유다만 낙오자가 되었을까?

예수님을 파는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베드로와 유다를 인간적으로 한 번 비교해보자.

누가 더 큰 죄를 지었는가?

유다는 은 30을 받고 “예수여 평안하십니까?” 하면서 입맞춤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까지 했다(욕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베드로가 더 큰 죄를 지었다.


누가 더 크게 뉘우쳤는가?

베드로는 닭이 세 번 울자 나가서 통곡했다.

하지만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받았던 은 30을 다 돌려주었고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고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

이것만 봐도 유다가 훨씬 더 많이 뉘우쳤다.

사실 유다나 열한 제자는 다 같이 부르심을 받았다.

둘씩 파송하여 보내셨을 때 각처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가며, 병이 고침 받는 역사가 있었다.

그때 틀림없이 가룟 유다도 거기 있었다(막 6:7-13).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유다도 함께 기록했고, 그 위대한 장소의 주역이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용서받고, 유다는 용서받지 못했는가?


공관복음서 전체를 살펴보면,

사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이 아니다.

애당초 예수님을 믿은 적이 없는 자라고 해야 맞다.

그래서 그 죄책감을 가지고 예수께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스스로를 처리해버렸으니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용서받지 못했다.

용서를 구했다면 용서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중보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한다.

죄를 짓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선한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선한 삶이란 내 모든 죄책감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는 삶이다.

죄책감으로 나를 처리하지 말고, 그 죄를 처리하신 주님께 나아가라.

책을 잠깐 내려놓고 그대 자신을 돌아보라.

얼마나 초라하고 나약한가?

조금만 느슨해지면 죄를 짓는 정도가 아니라 죄를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는 않는가?

그렇게 용서해달라고 기도해놓고 또 그 죄에 손을 대고 있는 그대를 목격할 때가 어디 한두 번인가?

그래서 그대는 너무나 자주 가룟 유다가 했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할 것이다.


‘나 같은 건 죽어야 돼. 난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 아닐 거야!

택하셨다면 이렇게 죄 가운데 넘어지는 나약한 인간일 수는 없어!’

이제는 자신을 보지 말고 다시 성경을 보라.

주님은 그대를 부르실 때 ‘자기의 원하는 자들’로 부르셨다.

그대의 수준, 그대의 능력, 그대의 됨됨이가 기준이 아니다.


오직 부르심의 기준은 ‘주님의 원하심’이다.

연약해도, 부족해도, 나약해도, 그대는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항상 주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있으려고 힘써라.

육체의 집요한 탄성(彈性)으로 진절머리 나는 죄를 또 짓게 되었을 때 가룟 유다의 자리에 서지 말라.

그대를 부르신 제자의 자리에 서라.

그대의 부르심은 ‘영원히 기꺼이’, ‘무조건 흔쾌히’ 부르신 부르심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 로마서 11장 29절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갈라디아서 3장 26절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 시편 51장 17절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 디도서 3장 5절


주님,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이 원하시는 그 자리에 있길 원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데 방해하는 마음들을 없애주시고 정직한 모습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새생명으로 살게 하소서.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시 73: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가수 윤복희 권사님의 ‘여러분’이라는 노래는 전 국민에게 많은 희망과 위로를 전해준 국민가요입니다.

원래 이 노래에는 국제가요제에 출품되는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영어로 된 2절이 있었습니다.

이후에 국내에서 가요로 불릴 때는 한글로 된 1절만 사용이 되었는데,

최근에 국내의 한 가요경연 프로그램에서 권사님의 요청으로 2절이 불러졌습니다.


권사님이 직접 해석을 붙인 영어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어둡고 캄캄한 밤을 걷고 있을 때

그가 너의 지팡이가 되어주신다고 말씀하신다네.

네가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기를 원할 때

그는 내가 바로 너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네.

그러니 웃으며 나를 바라보렴. 누구나 다 이 길을 걸어간단다.

그러니 나를 믿고 어깨를 피렴. 지금이 시작이니 멈출 수 없어.

이 길이 유일한 길이니 나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자.´


힘든 세상에서 지치지 않고 일어서 걸을 수 있는 것은

나와 함께 하시고 나에게 힘을 주시며

나를 위로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역시 이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 주님과 함께 오늘도 이 길을 힘차게 걸으십시오.

반드시 복되고 형통할 것입니다.


주님, 다윗과 같이 고난 중에도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믿음을 주소서.

나를 떠나지 않고 언제나 함께 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으십시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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