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유선진 (경기여고 43회) -
(필자는 2015년 현재 80∼81세 전후로 추측된다)
우리들이 새색시 시절엔 며느리 이름을 부르는 시어머니는 흔치 않았다. ‘새아기’, ‘아가’, ‘새아이’ 이렇게 불렀고, 아이를 낳으면 ‘어미’는 아이 이름을 따서 ‘아무개 母’ 라는 호칭을 썼다. 그런데 요즈음 친구들에게 며느리를 어떻게 부르느냐고 물으면, 그들 대답이 한결같이 이름을 부른다고 한다. 새아기, 새아가 라고도 해 보지만, 이름을 부를 때가 가장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며느리가 제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일견 단순한 호칭 문제일 것 같아도, 조금 생각을 깊이 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호칭 속에서 우리 사회 가정사家庭史 한 변천을 볼 수 있다. ‘새아기’라는 것은 보통명사이다. 새아기는 며느리를 의미한다. 며느리로서 지켜야 할 도리, 임무, 책임 등이 집약되어 있고, 그것을 이행해야 하는 위치임을 명시하는 것이다. 이름은 고유명사로서 모든 임무나 자격 이전에 그 존재를 우위에 두는 것이다.
며느리 이름을 부를 때가 가장 자연스럽다는 고부 문화, 고부 정서를 보면서 이 땅에도 새로운 고부상이 형성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실감한다. 결혼하고도 자기 이름을 잃지 않고 있는 며느리 실상은 절대적 권리로 군림했던 시어머니 위상 약화와, 상대적으로 입지가 커진 며느리 위치를 설명한다. 이러한 어쩔 수 없는 대세에 밀려 시어머니들은 자진해서 며느리를 이름으로 불러 주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내 며느리를 ‘엄지’라고 부른다. 그 아이가 내 며느리가 되기까지 6년간에도 엄지라고 불렀고, 두 아이 엄마가 되어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손가락 다섯 중에 으뜸이 엄지인지라, 네가 제일이라는 뜻 엄지이고, 동화책에 나오는 작고 가련한 엄지공주 같다고 하여 엄지라고 부른다.
물론 큰 소리로 “엄지야” 하고 부른 적은 없다. 내 가슴속에서 나 혼자 부르고 있는 이름이다. 그러니까 내게 그 애는 엄지이다. 그리고 내가 그 애를 엄지라고 부르고 있는 한, 그 애는 세상에서 제일착하고 어여쁘고 가련한 내 사랑으로 남게 된다. 나는 이 애가 사십이 되고 오십이 되어도 나의 엄지이기를 소망한다. 그것은 이름이 아니라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들만 넷을 두었다. 아들 넷이 자라는 집은 전쟁터요, 파괴 현장이다. 더구나 나는 애들을 기르면서 회초리는 고사하고 볼기 한 번, 큰소리 한 번 제대로 치지 않은 성미 느긋한 어미였으니 오죽했겠는가? 아버지까지 합친 다섯 남자 활개 짓은 지붕을 날릴 정도였다. 5부자가 엮어내는 역동의 회오리에 나는 언제나 저만치 날려가 엎어지기 일쑤였다.
나는 큰애가 대학생이 되자, 예쁜 여학생이라도 사귀어 집에 드나들게 하라고 부추겼다. “예쁜 여학생이 드나들면 좀 좋아?”하고…. 그러나 여자 형제가 없는 집 남자애는 이성異性에 늦되는지, 대학교 졸업반이 될 때까지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학교 축제 때 파트너를 동반해야 할 때에는 내가 친구 딸 중에서 한 명 조달해야 했다.
아들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수학과로 편입했다. 어느 날, 아들이 잘 정리된 노트를 빌려다가 베끼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두꺼운 수학노트였는데, 첫 페이지 글씨가 마지막 장까지 한 획 흐트러짐 없이 똑 고르고 반듯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여학생인지 몰라도 성품이 무척 단정하겠구나.”
내가 말을 하니, 아들이 보충 설명을 해 주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오빠, 세 식구 가장家長노릇을 하는 갸륵한 여학생이라는 것, 얼굴이 썩 곱고 키가 아주 작다는 것, 제일 먼저 도서실에 와서 맨 나중에 나가는데, 처음에는 경비 아저씨가 중학생이 몰래 들어와서 공부하는 줄 알고 야단을 쳤다는 것. ‘원, 기특하기도 해라.’ 나는 참으로 보기 드문 기특한 학생이라고 탄복했다. 그러나 그 여학생이 나의 엄지가 되리라는 것을 그때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엄지를 처음 보았던 날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1984년 가을이었는데, 그때는 신군부가 5공화국을 탄생시키고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하며 자리를 잡은 절정의 시기였다. 신군부는 정의사회구현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5공 정통성을 문제 삼는 민심을 다스렸다. 사회악 일소, 공직자 숙청, 과외추방 등이 그것이었다. 당시 과외 열풍은 가히 망국적이라 할 수 있었고, 신군부가 여기에 칼을 댄 것이다.
그들은 대학입시 대변혁을 일으켰다. 본고사를 없앴고, 일체 과외금지 조치를 내렸다. 수업시간 이외에는 교사들에게 질문하는 것조차 금했다. 교사들 뒤에는 감찰 요원이 따라다녔고, 고발함을 설치하여 과외를 하고 있는 교사와 학생을 고발하도록 했다. 서슬 퍼렇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자식 실력을 어떻게 하든 향상하고자 하는 모성의 노력 앞에는 넘지 못할 장벽이 없었다. 이런 엄마들 눈에 엄지는 안성맞춤 과외 선생이었다.
첫째는 도무지 대학생이라고 보이지 않는 그 애 외모였다. 작고 가냘픈 체격과 단발머리 해맑은 얼굴은 잘해야 중학생 정도로 보이고, 이 점은 어떤 날카로운 경비원 눈초리도 피할 수 있었다.
둘째는 그 애 실력과 성실성이다. 엄지와 함께 몇 달을 공부하면, 학생들은 반에서 수학만큼은 최고점을 받았다. 내 아들과 엄지가 클래스메이트인 것을 안 학부모 몇이 우리 집으로 와서 엄지를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엄지로서는 절대적으로 돈이 필요한 처지였다. 나는 즐겨 주선해 주었다.
나는 사실 엄지를 한 번 보고 싶었다. 여학생 얘기를 전혀 하지 않던 아들애가 엄지 이름을 자주 입에 올렸고, 그때 아들 얼굴이 아주 밝고 즐거운 표정이었기에 이미 특유의 어떤 예감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약속시각에 아들과 함께 나타난 엄지. 부엌에서 저녁준비를 하다가 이 애들을 맞이한 나는 그만 ‘퍽’하고 웃고 말았다. 단발머리에 청바지, 은행 빛 티셔츠를 입은 조그만 여자 애. 신비한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고 있는 너무도 작은 열세 살 소녀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과외를 시키다가 적발된 학부모가 구속되고, 벌금을 물고, 학생이 처벌을 받고, 교사가 퇴직을 당했다는 신문보도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어도, 엄지는 소녀 같은 외모 때문에 무난히 학비조달을 할 수 있었다. 학생들 또한 실력이 향상되어 만족해하였다. 이 과정에서 들려오는 엄지에 대한 칭송은 나를 기쁘게 하였다.
나는 때때로 엄지 얼굴을 떠올려 보곤 했다. 그 애 얼굴은 유백색이었는데, 양 볼에 분홍 장밋빛 홍조가 화사해서 그 아름다움을 도무지 어떤 다른 것에 비유해 생각할 수 없었다. 백합? 아냐. 백합처럼 청초하기는 하나, 그보다 따뜻해. 조선백자? 아냐. 백자처럼 기품이 있기는 하나 백자로서는 미흡해. 나는 이렇게 혼자서 엄지 얼굴을 상상해 보았지만, 어느 것으로도 비교하지 못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어느 때, 어디서 엄지를 떠올렸건, 내게 남은 마지막 감정은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한 줄기 통증이었다. 왜였을까. 나는 지금도 그 통증 정체를 설명할 길이 없다. 너무도 가냘 퍼서일까?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탓일까? 제 학비와 생계를 스스로 책임지고 있는 안쓰러움 때문인가. 아니면 그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 엄마들이 “송xx 선생님은 가르치는 동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아 딱해요”라는 말이나, “그 애 위가 선천적으로 기능부전이에요. 음식만 들어가면 아파서 쩔쩔매요. 그래서 숫제 굶고 살아요”라는 아들의 말 때문인가. 아마도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내게 엄지를 언제나 아픔이게 했던 모양이다.
이듬해, 이 애들은 수학과 졸업반이 되었다. 아들은 졸업 후에 군 복무, 그 뒤에 도미 유학 계획을 세웠고, 엄지는 교생실습, 아르바이트, 제 학점관리 등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게 바빴다. 그렇게 열심인 엄지 모습을 내게 전달하는 아들 표정은 승전을 전하는 병사 마냥 자랑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면서 너무나 편안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애를 사랑해요."
그 애를 사랑해요…사랑해요…아들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어느 정도 예견을 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엄지. 물론 좋은 여학생이다. 좋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훌륭한 아가씨다. 그러나 맏며느리로서, 더구나 장손부長孫 婦로서 합당한 상대가 못 된다. 나의 이런 대답도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천천히 생각해 보자. 급할 게 없잖니?”
겨우 이렇게 말했다. 아들은 뜻밖이라는 듯 놀라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어미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들 의사에 반대해 본적이 없는 못난 어미였다. 그 애들이 좋아하는 것은 나도 무조건 좋으니 어쩌랴. 나는 생生이라는 것이 아이들 마음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쟁취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충실하고 평화로운 나날이 모여 장구한 인생이 된다는 생각에서, 오늘 하루 충만하고 즐거워하라, 내일 때문에 오늘을 상처 내지 마라, 이렇게 아이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일렀다.
‘이다음에 어찌 되려고 그러니?’ 라든가 개미와 베짱이의 이솝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내일을 준비하는 삶을 강조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의 오늘이, 내일이라는 보이지 않는 시간보다 중요했다. 나는 아이들 학교성적 때문에 절망하지도 않았고, 이 애들의 지극히 평범한 인물됨에도 낙망하지 않았다.
이런 어미에게 익숙해져 있는 아들에게는 엄지를 사랑한다는 제 말에 엄마가 주저 없이 동의해 줄 것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천히 생각해 보자는 내 말은 아들에게 충격이었다. 그 애는 낙담했고, 외출에서 돌아오면 곧장 제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아들이 ‘그 애를 사랑해요’ 라고 말했을 때, 왜 선뜻 ‘그것 참 좋은 말’이라고 하지 못했을까.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해오면 ‘그것 참 좋은 말’이라고 대꾸했었는데, 그래서 아이들은 무슨 말을 시작하려면, 시작하기 전부터 먼저 ‘엄마, 이것 참 좋은 말’이라고 서두부터 꺼내고 말을 하는데, 큰아들이 제 딴에는 힘들게 했을 ‘그 애를 사랑해요’라는 말에 왜 나는 선뜻 ‘그것 참 좋은 말’이라고 못했을까. 너무도 중요한 말이기 때문이었을까?
나도 어쩔 수 없이 이 세상 결혼풍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들 가진 어미였던 것이다. 결혼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며, 결혼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닌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고, 인생에서 최후, 최선의 투자여야 한다는 영악한 계산을 엉큼하게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들의 우울해 보이는 뒷모습을 볼 때면, 또 우는 듯, 웃는 듯한 엄지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릴 때면, 아들 방을 찾아가 ‘그것 참 좋은 말’이라고 해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아들과 불편한 관계였고, 그것보다 이미 엄지를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온 아들 얼굴이 사뭇 화덕처럼 달구어져 새빨갛고, 호흡은 씨름을 끝낸 선수처럼 거칠었다. 손에는 종이 한 장이 구겨져 있었다.
“엄마는 좋겠네요. 그 애가 결핵 2기란 말이에요. 확실한 반대 명분이 생겼잖아요.”
한껏 야유조 말을 해대며 두 계단 세 계단씩 뛰어서 제 방으로 올라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이냐? 엄지가 결핵 2기라니. 나는 아들 방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그동안 어머니하고 대화할 분위기가 못 되었잖아요.”
엄지가 교생실습을 나간 학교는 달동네에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교육여건이 열악한 이 학교에서 어서 4년이 흘러 다른 곳으로 전근되기를 기다리는 듯 맥이 빠져 있었고, 학부모들은 생계에 바빠서, 아이들 실력은 교사와 부모로부터 방치되어 있었다. 방과 후에는 학습지도를 할 수 없는 교육현장에서 엄지는 아이들 노트를 20권에서 30권까지 수거해 갖고 다니면서 붉은 펜으로 일일이 지적을 해 주고, 고쳐주는 열성을 부렸다.
거기다가 아르바이트는 여전히 해야 하고, 음식은 잘 먹지 못하고…. 두 달 만에 쓰러져 병원에 가니, 진찰하던 의사가 정밀검사를 받아 보라고 했다. 흉부 X선 촬영, 객담 검사, 피 검사를 했고, 결과는 결핵 2기라는 것이다.
“어머니, 전 그 애를 사랑해요, 더더욱 요.”
나는 말이 아니더라도 그 눈빛으로 아들의 결심을 알 수 있었다.
“가자.”
나는 아들을 앞세우고 엄지를 찾아갔다. 미열로 얼굴이 분홍장미가 된 엄지는 조그맣게 아랫목에 누워 있었다. 마치 강보에 쌓인 아기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 애 손을 잡았다. 아들에게 엄지 입원을 지시하고, 나는 집을 향해 언덕길을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아들에게 말했다.
“한 가지 약속을 해다오. 너는 차질 없이 공부만 하겠다고…. 이 애는 엄마가 맡는다.”
“알았어요.”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헛된 약속인가.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내가 엄지 병실에 들어서면, 이미 아들은 병상 그 애를 향해 큰 키를 활처럼 구부리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들 손엔 대한결핵협회, 보건소 등에서 가져온 결핵에 관한 책자가 들려 있고.
“알았지, 응? 약을 시간 맞추어 규칙적으로 먹는 게 제일 중요해. 휴식과 함께 영양 섭취는 그다음이야. 첫째도 약, 둘째도 약, 셋째도 약이야. 알았지?”
“응, 알았어. 알았 대두….”
마침 회진하러 들어온 담당의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 요즘 그대와 그대 씨 때문에 나까지 행복해져요.”
아들은 엄지 휴학절차를 밟았고, 퇴원해서 완치에 이르기까지 엄지의 눈물겨운 투병생활에 동참했다. 엄지에게 있어 가장 큰 투병의 장애요인은 위 기능부족이었다.
몇 수저 밥도 소화를 못 시키는 위에 한 주먹씩이나 되는 독한 약을 하루에도 몇 번씩 넣어야 했으니. 엄지는 결핵균에 의해서 아니라 소화 장애로 죽어갈 것 같았다. 그 고통을 지켜보는 것은 앓고 있는 당사자 못지않게 힘든 일이었다. 엄지의 곱던 얼굴은 누렇게 버석거리며 풀잎처럼 시들어 갔다. 열심히 약을 복용해도 새로운 공동이 생기고, 내성이 생겨 더 독한 약으로 바꿔야 하고…. 하얀 휴지에 점점이 붉은 선혈이 꽃잎처럼 퍼질 땐, 엄지의 작은 몸은 절망으로 자지러들었다.
그 애 가족도 나도 힘을 잃었지만, 완치의 신념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아들뿐이었다. 그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나는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투병생활 2년 8개월 만에 이제 약을 끊어도 좋다는 판결이 내려졌고, 엄지는 복학하여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5월의 신부가 되었다.
세상에 어느 신부가 나의 엄지처럼 찬란하게 아름다웠을까? 모진 폭풍을 이겨내고, 자랑스럽게 초가을 미풍에 나부끼는 코스모스인가, 백합화인가. 아름다운 화관을 쓴 엄지는 승리한 자만이 지울 수 있는 자랑스러운 미소로 하객들 박수에 겸손한 예를 올렸다.
새색시로서 스무날을 함께 살다가 미국으로 유학 가는 날, 공항출구를 통과하다가 돌연 뒤돌아 뛰어와 내 가슴에 작은 새처럼 안겨 울던 엄지는, 지금 두 남매 어미가 되어 있다. 순수수학과 전산학의 두 가지 석사 학위도 땄고,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살림살이에도, 육아에도, 학문에도 다섯 손가락 중 으뜸인 내 사랑 엄지. 그 작고 약한 몸속 어딘가에 활화산 같은 용암이 분출되는지 경이롭다. 사랑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닐는지….이제 내 며느리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을 맺는다. 아들 연인으로서 6년, 며느리로서 7년, 엄지와 나눈 13년은 내게도 엄지에 못지않은 중요한 변화의 시기였다. 내 자식에 국한되었던 모성이 엄지라는 작고 약한 여인을 통해 세상으로 확대되는 시점이 되었고, 나 혼자 겪으며 삭혔던 갈등은 나의 모성을 성장시킨 동시에 인간적으로도 성숙시켰다.
나는 마치 천사표 시어머니처럼 묘사되었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는 얼마나 교묘한 방법으로 연약한 엄지 마음에 상처를 주었는지 하느님과 그 애와 나만이 안다. 내가 엄지의 병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엄지가 독백처럼 썼던 일기 한 구절을 나는 우연히 본 적이 있다.
"싫다. 관심도 싫다. 동정은 더욱 싫다. 내 병세가 악화될까 보아 불안해하는 시선. 싫다. 이대로 나를 사랑해 줄 수는 없는가?"
병균이 들끓고, 좀 먹어가는 내 작고 썩은 몸뚱이를, 그 자체를 사랑해 줄 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가장해, 엄지에게 가한 나의 압박이 얼마나 그 애를 힘들게 했나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용서를 빈다. 흔히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에게나 장단점이 있다고. 나는 이 말에 반대한다. 장단점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동전 양면같이 장점이 곧 단점이고 단점이 바로 장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엄지 고집은 엄청나다. 내가 수용했던 것은 엄지 질병과 환경이 아니라 그 애 고집이었다. 1년간 휴학하고 복학했을 당시, 엄지 가슴앓이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을 때였다. 마냥 학교를 쉴 수 없어 담당의사와 상의하고 복학을 했지만, 사실 조금 무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우리는 엄지가 쉬엄쉬엄 출석하여 시험을 보고, 그냥 마지막 1년을 채우고 졸업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엄지는 저를 염려하는 모든 사람 뜻은 아랑곳없이 맨 먼저 도서관에 가고, 제일 늦게까지 남아서 공부했고, 아이들 가르치고, 수학참고서 만드는 출판사 일을 누구보다도 많은 분량을 집으로 가져가 늦도록 일을 했다. 도무지 조마조마해서 지켜볼 수 없었다.
“몹쓸 것. 제 고집대로 저러다가 어느 거리에서 쓰러져도 이제 몰라.”
엄지 어머니 말이었다. 나 또한 당황하고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른들 정성을 보아서도 저럴 수 있을까 싶었다. 제 몸무게 100g을 늘리기 위해서 노심초사하는데, 저렇게 제 고집대로 밀고 나가 200g을 감소시킬 수 있는 걸까? 그러나 기왕에 그 애를 사랑하기로 했다면, 갈등 없이 사랑하리라 마음먹었다.
고집이란 얼마나 강한 의지인가. 고집으로 보지 않고 의지로 보기로 했다. 실제로 그 고집은 엄지의 탁월한 의지로서, 빈속에 약을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먹었던 인내였고, 결핵협회 먼 곳까지 단 한 차례 빠짐없이 주사를 맞으러 다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고부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각자 관점에서 장점을 볼 줄 아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아니 장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하겠다. 이제 우리 가정사에서 고부갈등이라는 단어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고부 관계의 새로운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시어머니인 우리 친구들의 극진한 며느리 사랑을 보면서 이러한 이해와 사랑이 우리 정서로 굳어져 장구한 세월이 흐른다면, 그것이 곧 민족 정서로 토착화되지 않겠는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시어머니들이 부단히 인간적인 성숙을 도모하면서 새로운 고부 문화 창조에 의무와 책임을 느낀다면 젊은 며느리들 또한 이에 동화되리라는 긍정적인 견해를 가져 본다.
내 나이 환갑이 넘었다. 환갑은 십이 간지가 새로 시작되는 해이다. 그래서 한 살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육십에서 칠십에 이르는 나이는 인생의 절정이라고 말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다짐하지만,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쇠락의 나이이다.
쇠잔이란 얼마나 평화로운 체념인가. 젊음의 열정과 과욕이 씻기어 나간 평화. 그리고 쇠잔이란 또 얼마나 사람을 조그마하게 만드는가. 나는 아주 작아져서 엄지의 엄지가 되어 그 등에 업히고 싶다.*
♬ Inserted Music - Last Night Serenade -Toi &To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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