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애 구현과 독자 중심 수필관
이 글은 정성화의 수필집『봄은 서커스 트럭을 타고』(2013)를 읽고 그의 수필 세계를 짚어보는 소박한 작가론이다. 다음 구절을 마중물로 해서 이 글을 시작해 본다.
읽고 있으면 어느새 마음 언저리가 뜨뜻해져 오는 수필, 아랫배로부터 둔중한 통증을 끄집어내는 수필, 세상이 환해 보이도록 만드는 수필 등, 그런 수필들로부터 수필의 걸음마를 익혔지만 아직도 나의 수필은 혼자 걷는 게 힘들다. 넘어지고 고꾸라지고 미끄러지면서 가고 있다. - <다시 수필이다>에서
정성화의 수필관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한 작가의 수필관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이보다 더 많은 자료와 언설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짧은 구절은 정성화 수필의 기본 바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 이설이 없을 것이다. 위의 문장은 비유적 표현을 앞세워 주장을 에둘러 말하고 있어 뜻하는 바를 명쾌하게 확정하기 어렵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다른 어떤 논리적인 언술보다 작가의 관점을 설득력 있게 전달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명증한 이론이나 논거 제시를 통해서는 불가능한 강한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성화가 추구하는 수필은 인간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수필, 정서적 감동과 충격을 주는 수필, 세상과 인간 삶을 긍정하는 수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는 누구나 창작에 관해 자기 나름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 자의식은 자기 창작에 대한 냉철한 성찰을 멈추지 않고 자기 변화를 꾀하는 원동력으로 작동한다. 작가로서 주체성과 개성을 확립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수필가에게도 마찬가지다. 기초적인 장르 인식에서 구체적인 창작 전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의 자의식은 한 수필가의 창작을 이끌어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런 자의식 대부분은 ‘창작방법’으로 귀결되지만, 정성화는 다른 면모를 드러낸다. ‘독자’라는 요소에 크게 무게를 싣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수필 작품이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하는 점이다. 수필이 따뜻한 인간애를 통해 독자를 감동하게 해야 함을 강조한다. 수필은 독자로 하여금 작품을 읽고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고, 그로써 감동을 받고, 인간적인 소통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성화의 수필관은 다음과 같은 문학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문학의 밑돌을 괴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인간에 대한 사랑인 것 같다. 삶의 불량스러움이나 냉소까지도 따뜻한 연민으로 감싸 안는다. 내가 문학에 끌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는 ‘쓰는 사람’ 이전에 ‘보고 느끼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멀리 가는 물>에서
문학은 세계와 인간 삶의 균열이나 결핍에서 출발한다. 운명의 한계, 사회와 제도의 모순, 개인 내부에 작동하는 선과 악의 갈등, 문화적인 여건 변화에 따른 인간 삶의 황폐화, 인간의 품격을 훼손하는 천박한 욕망 등에서 예술과 문학은 시작된다. 시인이나 작가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조우하는 결핍과 문제에 관해 자기 태도를 표명하고 가치평가를 하는 사람이다. 때에 따라서 문학은 사회의 어두운 그늘과 인간의 사악한 부분을 폭로하기도 하고,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비판하기도 하며, 물신주의의 팽창에 따른 인간성의 황폐화나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이 보여주는 이 같은 태도는 궁극적으로 인간성 옹호와 인간 삶의 긍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지점에서 정성화의 문학관이 시작한다. 위 예문에서 말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이어온 ‘휴머니즘’이라는 문학의 기본적인 가치이기에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그러나 기본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고정된 작가의 관점에서 대상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쓰는 사람’보다는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 관심과 사랑으로 감싸 안는 ‘보고 느끼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 인간애의 문학은 문자로 표현하기 이전에 가슴으로 느끼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정성화는 수필도 인간애를 실현하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천천히 흐르는 물결을 따라 자라는 논배미의 어린 모들, 그 어린 모들을 데리고 굽이굽이 길을 가는 논두렁처럼 수필도 그렇게 가야 하지 않을까.”(<다시 수필이다>에서)라고 말한다. 수필은 논에 심어진 모들 사이를 천천히 흐르는 물결, 논 안의 모와 물을 품에 안고 길을 가는 논두렁 같아야 한다고 것이다. 그래서 수필이 가는 길은 “세상과 우리를 부드럽게 이어줄” 곡선이라고 보았다. 그 길은 현실적인 목표에 일찍 도착하려고 옆도 둘러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가는 직선이 아니다. 그는 시골 버스와 같이 정류장인 아닌 어느 곳에서도 사람을 태우고, 사람뿐만 아니라 강아지와 돼지 새끼까지도 싣고 온갖 곡식과 푸성귀도 한 자리를 차지한 채 모두 함께 장터로 가는 수필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이는 수필이 가장 인간적인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으로 요약된다.
정성화는 수필이 가장 인간적인 문학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개인적으로는 확고한 신념일 수 있으나 그 진위를 가릴 수는 없다. 인간성 옹호는 예술과 문학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가치이기 때문이다. 수필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고 사회 구성원의 인간적인 소통을 이루어내어야 한다는 것은 당위적인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어도, 그 구체적인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문학의 방법도 언제나 보편적인 원리로 존재하지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정성화의 수필관은 당위적인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필에 대한 정성화의 인식은 남다른 데가 있다. ‘독자 중심’의 수필관이 그것이다. 수필을 쓰는 사람이면 자기 나름대로 수필에 대한 개인적인 관점을 내장하고, 그것을 직접 피력하는 때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대체로 창작 방법이나 기교 차원에 집중한다. 즉, 독자에게 어떤 감동과 메시지를 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작을 두고 고민하는 힘이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의 문제로 확대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향과는 달리 수필가 정성화는 인간 삶과 세상에 관해 수필이 해야 할 역할을 고민한다. 이것이 그의 독자 중심 수필관의 요체다.
이러한 정성화의 수필관이 작품에서 어느 정도 구현되었는지는 그다음 문제다. 수필을 이해하는 그의 관점에 주목하는 까닭은 작가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일반적인 수필론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독자의 작품 수용과는 무관하게 작품만이 범람하는 현재 우리 수필 문단의 현실에 비춰볼 때, 독자 중심의 수필관은 상식적이지만 그 의의가 크다. 작품은 양산되지만, 갈수록 수필 독자는 감소한다. 수필이 읽히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수필가는 없다. 포기했는지 아니면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지 모르지만, 독자가 빠진 창작만의 잔치를 이어가고 있다. 수필에서 독자가 떠나는 현실을 두고 많은 작가가 이 시대의 문화적인 여건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전적으로 오류는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작가의 책임 회피 내지는 핑계임을 부인할 수도 없다. 우리의 수필이나 수필 이론은 오랫동안 독자에게 다가가려는 고민과 노력을 게을리했다는 질책을 면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정성화의 수필 인식은 남다른 면모를 보였고, 그 의의도 자못 크다고 하겠다.
2. 따뜻하고 긍정적인 작가의 시선
앞에서 정성화의 수필관을 살펴보았다. 다음 순서는 그의 수필관이 작품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이론으로 표명된 한 작가의 수필관이 실제 작품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작가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장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론과 실제 작품의 밀착 정도는 그 작가의 문학적 진정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수필 창작은 어떤 화제나 대상을 글감으로 선택하여 그것의 사실과 가치를 서로 섞어 하나의 완결된 언어 구조물로 만드는 일이다. 이는 작가가 사실을 가치로 전환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사실이나 현실의 실체는 언어 이전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그것을 언어로 호명하고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현실이 되는 것이다. 작품 속에 드러나는 대상과 현실은 작가의 언어에 의해 인식된 결과물이다. 작가는 실재하는 현실과 경험을 다치지 않고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신적으로 재생산하는 셈이다. 수필은 일상의 경험적인 사실을 담아내는 문학이라고 인식한다. 그래서 사실을 조작하거나 왜곡하는 것에 민감하게 거부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경험적 사실에 토대를 두는 역사 기록이나 수필 창작도 해석이고 정신적인 재생산이다. 더욱이 수필은 문학이고자 하는 욕망 안에 놓여 있다. 사실만을 추종하고는 이 같은 욕망을 충족하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이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대상을 바라보는 정성화의 시선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따뜻함과 긍정이다. 작가는 “둥근 눈으로 보면 세상이 둥글어 보이고, 모난 눈으로 보자면 세상은 온통 각져 보인다.”(<전망 좋은 방>에서)라고 한다.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심각한 문제와 모순을 안고 있는 현실을 은폐하고, 모든 것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보자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결핍과 균열의 삶을 치유하는 희망의 원리로서 긍정이다. ‘전망 좋은 방’을 두고 생각해 보자. 작가는 밖의 경치가 좋아서 전망이 좋은 것이 아니라, 밖을 내다보는 현 위치가 전망을 좋게 한다는 것이다. 경치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경치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전망하는 주체의 시선과 위치라는 뜻이다. 긍정하고 수용함으로써 상대와 화해하는 길이 열리고, 불편한 갈등은 극소화되며, 그만큼 생의 활력소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상을 따뜻하고 긍정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작가의 시선이 작은 것에까지 미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실적인 목적성을 전제하고 대상에 다가갈 때는 언제나 필요한 것만 선택하기 마련이다. 그 선택은 목적에 맞지 않은 것은 쉽게 폐기한다. 따뜻한 시선은 대상을 무목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그래서 작은 것까지 보고 마음에 담는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에서 화자는 졸업 삼십 년 만에 여고 동창회에 나간다. “동창회란 우리 삶의 공간 중에서 가장 청정지역이 아닌가 싶다. 그 모임에서 필요한 것은 우정과 추억뿐이다.”라고 한다. 그날 동창회에서 찍은 단체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화자는 “다들 얼굴이 ‘성냥알만 하다. 그래도 이젠 누군지 다 안다. 하얀 얼굴들이 진주알보다 더 예쁘다.”라고 말한다. 우리 주위에서 목격하는 모든 동창회가 언제나 깨끗하고 순수한 것만은 아니다. 모처럼 만에 만나 자리인데도 시비나 다툼이 없지 않다. 보이지 않는 저변에는 미움과 시기가 흐르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혼탁한 우리 사회에 견주어 볼 때 동창회는 그래도 청정지역이고 동창들의 모습은 진주알처럼 예쁘다고 생각한다. 그 시선에 따뜻한 인정이 넘쳐난다. 여기에서 그것의 진위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작가 자신의 마음과 시선이다.
정성화 수필에 드러나는 작가의 긍정적이고 따뜻한 시선은 최종적으로 나와 너의 화합에 맞춰진다.화합 정신은 작품에서 각개 존재의 고유성 인정, 용서와 포용, 상생의 윤리 등으로 구체화된다. 작품<크레파스가 있었다>에서는 각자 다른 색을 가진 크레파스가 하나의 통 속에 공존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인간도 크레파스와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대부분 자기 색이 가장 좋고 다른 색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무시하고 업신여긴다. 남과 다른 차이는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각자의 고유성을 무시하고, 서로 비교하여 순위를 매기며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인정머리 없는 짓이라고 한다. 작품 <각도>는 작가의 어머니한테 돈을 빌려 가 갚지 않고 도망간 고등학교 친구의 이야기다. 그 일로 말미암아 작가 가족은 지독한 고통을 겪었다. 작가는 긴 세월이 흐른 후 그 친구가 모든 지인과 연락을 끊고 서울 변두리에 숨어 산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서 “그녀도 가끔은 내가 겪을 고통을 상상하며 우울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용서란 그리 거창한 게 아닐 것이다. 내 마음을 상대방의 마음자리에 놓아보고 그의 마음 각을 읽어내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한다.분노의 각을 풀고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읽어내면 용서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의 작품에서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대를 포용하는 마음 자세는 상생의 정신으로 이어진다. <강을 생각하다>에서 부부의 상생과 화합을 강물과 강바닥의 관계에 비유하여 말한다. 한쪽이 강물로 흐르고자 하면 다른 한쪽은 얼른 몸을 낮추어 강바닥이 되어 주는 것이 부부의 관계라는 것이다. 강바닥만큼 강물을 아껴주는 것이 없고, 강물만큼 강바닥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없다. 가장 이상적인 상생의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물을 따뜻하게 대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묵묵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연민이고 사랑이다. 특히, 이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난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고 거대담론에 묻혀 사라져가는 작은 일상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따뜻한 인간애와 긍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일상생활을 문학으로 구성하는 수필에서 작은 것에 관심을 쏟는 섬세한 언어와 정서는 필수적이다.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던져주는 <미얀마 선원>을 읽어보자. 이 작품은 선장인 남편의 배에서 일하는 미얀마 선원에 대한 이야기다. 남편의 배에 동승한 미얀마 선원에 관해 다음처럼 말한다.
그들은 세상의 오지(奧地)에서 만나 서로를 젖은 눈으로 바라보며 아픔과 외로움을 서로 보듬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여우 같은 영악함으로 단련되어가고 있을 때, 그들은 곰 같은 순박함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영악함에 물들 이 세상은 곰 같이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소외시킨다. 미얀마 선원처럼 우리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나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존재를 따뜻한 인간애로 포용하고 긍정하는 것,여기에서 독자의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감동이 시작된다. 인간애와 긍정은 정성화 수필의 출발점인 동시에 도달점이다.
3. 감동의 근원으로서 통찰과 비유
앞에서 수필에 대한 정성화의 기본 관점을 ‘독자 중심의 수필관’으로 요약한 바 있다. 그는 무엇보다 독자를 감동하게 하는 수필을 강조했다. 감동을 통해 독자와의 인간적인 소통을 이루어내는 것이 수필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작가가 독자에게 감동을 주려고 애써도 독자가 작품에서 감동하지 못하면 소용없는 일이다. 감동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한 작품이나 작가의 수필집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었는지 그러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다. 작품이나 작품집을 읽은 모든 독자를 찾아 물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지만, 그것은 실천 불가능하다. 결국 독자를 감동하게 할 요소를 찾는 길은 텍스트 분석이다. 텍스트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는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것으로 인식되어 온, 그 장르만의 고유한 문학적 관습과 규율이 있다. 이것도 추측이나 예상에 지나지 않지만, 문학비평이 ‘독자 감동’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정성화의 이 수필집에서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데 핵심적인 요인은 많다. 그 중 두 가지에만 주목해 본다. 예리한 통찰력, 기발하고 역동적인 비유가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요소가 어디까지나 평자의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설정한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정성화 수필이 독자와의 공감대를 확대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소는 뛰어난 통찰력이다. 그는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를 여러 각도에서 열어 보인다. 그 결과 독자에게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들에 주목하도록 선도하고, 익숙하여 당연시하는 진실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작품에서 이 같은 방법은 대개 비유와 아포리즘을 통해 낯설게 제시된다. 독자는 낯설게 제시된 것에서 받는 정서적 혹은 인지적 충격으로 말미암아 논리적 판단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작가의 생각과 정서에 흡수되고 만다. 여기서 감동이나 공감이 확대한다. 사물과 세계에 대한 통찰은 지식과 논리보다는 오랜 삶의 경험을 통해 체득된 예리한 사고나 통합적인 직관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통찰의 도달점은 객관적인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다.
① 소박한 눈으로 보자면 여행이란 일상이라는 호수에 던져진 하나의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다. 흔들리던 수면도 곧 잠잠해진다. 바닥에 가라앉은 돌멩이가 이따금 들썩거리겠지만 일상의 수평은 바뀌지 않는다. 바닥의 돌멩이를 이따금 들여다보면서 혼자 미소를 짓는 것, 그것만으로도 여행의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 <언플러그드(unplugged) 풍경>에서
② 행복은 콩물처럼 부르르 끓어 넘치기가 쉽다. 그래서 가슴에 남은 양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분노와 울분은 무거워서 가슴속 저류조에 그대로 고인다. 우리가 행복했던 기억보다 슬프고 힘들었던 기억을 더 오래 갖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갑과 乙>에서
③ 돈이란 강아지 목에 매달아 놓은 줄과도 같다. 그래서 줄의 길이만큼 자유가 허락되며, 그 줄이 허락한 거리보다 더 멀리 가려하면 줄은 어김없이 목을 조여 온다. 줄이 묶여 있는 곳으로 되돌아올 때의 쓸쓸함은 그를 깊은 상실감에 빠져들게 한다. - <강을 생각하다>에서
여행, 행복과 분노, 돈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대목을 제시해 보았다. ①에서 작가는 여행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행은 깊은 호수에 던져진 하나의 돌멩이처럼 일상의 물결을 크게 바꾸지 못하지만, 바닥에 가라앉은 돌멩이를 들여다보듯이 자기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자신을 만나면서 미소를 짓는 여유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②에서는 행복과 분노를 서로 비교하면서 그 속성을 말한다.행복은 가마솥에 끓이는 콩물이 순식간에 부르르 넘치는 것과 같이 금방 사라지지만, 분노와 울분은 가슴속에 깊이 가라앉아 오래간다고 말한다. ③에서는 강아지 목에 매달아 놓은 줄과 같은 것이 돈이라고 생각한다. 돈은 줄의 길이만큼 자유를 주고, 주어진 길이를 넘어서면 목을 조여 온다고 한다.
위 예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작가의 통찰력은 세상 원리와 인간 삶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여행, 행복, 돈에 관한 이러한 통찰은 다른 사람이 언제 어디서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간파한 내용이다. 정제된 지식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 같은 통찰은 초보적이고 상식적이다. 예술과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통찰 끝에 남는 결과물이 아니다. 통찰 과정을 따라가는 독자에게 사고와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주고, 거기서 받는 감응을 더욱 생생하게 해주는 데 의의가 있다. 독자의 무의식에 침몰해 있는 어떤 대상의 의미와 가치를 의식으로 끌어올려 주는 힘이 바로 작가의 통찰력이다. 정성화가 작품에서 보여준 통찰력은 존재와 대상의 본질을 찾아내는 데 집중된다. 그것은 해석이고 의미 부여라 할 수 있다. 독자에게 대상의 겉모습 너머에 있는 진실과 본질을 보라는 계몽이기도 하다.물론 문학과 예술은 심미성을 추구한다. 예술적 가치가 심미적 가치라는 등식은 예술론에서 오랫동안 부동의 원리로 인식됐다. 작품이 지식과 통찰과 이해를 전달한다는 인식적 기능을 쾌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예술의 가치를 심미성에 두는 관점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술작품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지에 관해 우리를 계몽할 수 있다. 작품이 우리를 계몽시키는 정도만큼 예술로서 더 나은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술은 우리가 예술이 아니었더라면 깨닫지 못했을 방식으로 우리 정신의 지평을 깊게 하거나 확장시킬 수 있다.” (매튜 키이란, ?예술과 그 가치?, 북코리라, 135쪽.)특히 예술과 감상자의 소통이란 측면에서 보면, 통찰이나 이해 등과 같은 작품의 인지적 속성은 소통을 직접적인 방향에서 지원한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정성화의 수필에서는 이러한 인지적 속성은 풍요로운 비유와 아포리즘을 만나 독자와의 소통을 배가시키고 있다.
정성화 수필 세계를 떠받치는 중심 기둥은 비유다. 특히, 은유는 그의 수필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풍성하고 기발한 그의 은유는 독자를 감동의 세계로 유인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그 은유가 단지 문장 표현 기교 차원에 머물렀다면, 현란한 수사 이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은유의 힘이 세부적인 문장에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구조적인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말이다. 작품을 읽는 과정에서 독자는 은유를 만나면 강한 전율을 느끼는 동시에 거대한 힘에 이끌려 작품 속에 빠져들고 만다. 그의 수필에서는 은유가 다 지나가야 독자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속된 말로 그는 은유를 통해 독자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거대한 비유의 의미 앞에서 감동이 증폭될수록 독자는 왜소해지기까지 한다. 정성화만큼 은유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수필가는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버거운 것이다. 그러나 삶의 갈피갈피에는 누군가 일부러 숨겨놓은 듯한 ‘다행’이라는 것이 있어 아무리 힘들어도 삶의 다음 장을 펼쳐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다행이란①삶의 가지가 부러진 자리에 새 가지를 뽑아 올리는 힘이다. ②바위 아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설핏 찾아든 햇살을 따라 악착같이 줄기를 밀어 올리는 씀바귀의 마음이다. - <다행이란>에서
은유의 왕국이다. 무엇보다 특징적인 것은 은유가 다성적(多聲的)이고 입체적이란 점이다. 가장 일반적인 은유 형식은 ‘A=B’이다. 보조관념인 B가 단조로우면 의미 파장이 작다. 위의 작품에서 만약‘다행(A)은 힘/ 씀바귀이다’라는 형식이었다면 은유의 효과는 반감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보조관념 ①과 ②는 몇 개의 개념이 중층적으로 포개지고 있다. 여기서 파생하는 의미의 확산은 끝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를 함축성이 부족한 설명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다 하더라도 산문문학인 수필에서는 시적인 압축성보다는 설명적인 요소가 독자와의 소통을 확대하는 데 훨씬 우호적이다.더욱이 정성화 수필의 비유는 거의 기습 공격과 같아서 독자를 한시도 편안하게 두지 않는다. 가령 이런 경우다. 험한 파도를 헤치고 항해하는 바다의 배를 두고 “가족이란 이름의 안전띠를 매고 바다 위로 매일 번지 점프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한다. “여행이란 내가 알고 있는 형용사와 동사의 리얼리티를 경험하는 일”이란 문장에서 이르면 비유가 극치를 이룬다. “추가 흔들리지 않는 시계는 창칼을 빼앗긴 병사처럼 보였다. / 절망이라는 나무는 하루 만에도 다 자라는 나무였다./나는 그것(콩나물 뿌리)을 ‘간절함’의 흔적이라 생각한다./ (돈은) 우리 가족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혈액이었다./ 다행은 때때로 저보다 덩치가 큰 행운을 너끈히 업어 오기도 한다.” 등과 같은 비유 혹은 은유는 정성화의 작품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유사성에 의한 연결이지만, 그 유사성이 확연히 드러날수록 긴장감이 줄어지고 수사적 기교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둘의 의미상 거리가 멀수록 연결의 끈이 느슨해질 수 있으나 의미 변화와 확장을 활성화시킨다. 그만큼 창조적이다. “창조적 은유가 사물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제시할 뿐 아니라 지성을 개발시키(고)―(중략)―사물의 숨겨진 측면을 열어 보여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를 좀 더 폭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오성호,?서정시의 이론?, 실천문학사, 192쪽). 정성화 수필에서 화소나 대상은 대부분 비유에 의해 의미와 가치를 획득한다. 이처럼 기발하고 능숙하게 비유를 운용하려면 작가의 깊은 사유와 뛰어난 상상력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정성화의 수필은 통찰력, 비유의 힘, 상상력, 사고력의 총화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힘이 있다.
4. 뚜렷한 주제와 개성적인 모럴
오늘날 우리 수필은 독자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유가 많다. 그 중 하나가 지금 점점 힘을 잃어가는 문학의 전통적인 순수함을 견지하려는 고집이다. 시대착오적인 굴레에 갇혀 있다. 문학의 심미성과 형상화라는 미신에 빠져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문학은 영원불변의 형식과 가치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시대 흐름과 함께 자신을 바꾸어가는 것이 문학이고 수필이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의 미련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수필은 문학이다’라는 외침 대신 ‘수필은 문학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라는 어깃장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 수필에 절실한 것이 독자와의 공감이라면, 수필은 인지적이고 교술적인 요소를 과감히 수용해야 한다. 문학을 위반하는 이것이 수필의 태생적인 본질이기 때문이다.
과거 경험이나 일상의 파편을 끌어와 의미 있는 언어 구성물로 제작하는 것이 수필 창작이다. 그런데 대부분 과거 경험과 일상이라는 대상을 앞에 세우고 작가가 그 뒤를 포복하면서 추종하는 방식을 취한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대상은 주체를 드러내는 통로고 재료이다. 창작이란 실제 경험을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수필가의 사상과 삶의 관점이 드러나야 한다. 수필을 쓴다는 것은 이 세계와 내 삶에 대한 가치평가이다. 또한, 그것은 시공간을 차지하는 존재와 사건에 대한 태도 표명이고 윤리적 결단을 내리는 일이다. 필요한 것은 작가의 모럴이다. 모럴의 표명, 이것이 오늘날 수필의 가야 할 길이다. 실체가 없는 문학에 매달려 사상누각을 짓고 있는데 어느 독자가 가까이 다가오겠는가.
정성화의 수필에는 작가의 모럴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이 선악이나 진위의 문제를 떠나 있다는 점은 말할 나위도 없다. 수필은 윤리를 가르치는 교실도 아니고, 논리에 입각하여 자기주장을 펴는 논문 쓰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과 인간 삶을 이해하는 작가만의 고유한 관점과 방법을 확립하는 일이 그 중심에 놓여야 한다. 이를 주제의식이나 교술적인 문장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정성화의 수필은 문학이란 미명에 질식해 주제가 휘발된 수필, 형상화라는 고상한 착각에서 비롯된 잔잔한 묘사만 난무하는 수필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수필은 어느 한편으로 보면 대담하고 남성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사유와 언어가 예리하고 적확하지만, 이야기는 거침없이 전개한다. 자기 자신을 비의 속으로 감추지 않고 용감하게 드러내 보인다. 작은 것과 소수를 포용하지만, 자질구레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만큼 자기 관점이 확립되어 있다는 말이다. 독자를 향해 나부끼는 그의 깃발은 선명하다. 그래서 후련하고 편하다. 이는 그의 수필이 뚜렷한 주제와 개성적인 모럴을 지향하고 있음을 방증해 준다. 하지만 여기에 오래 머무르면 지금의 스타일이 패턴으로 굳어질 수 있다.그렇게 되기 전에 서둘러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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