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인간이란? 자유!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안규수 2013. 9. 30. 03:46

 

 

    그리스는 유럽의 고향이자 어머니다. 서양문화의 원천이다. 그리스인이 남긴 유산이 무엇일까.

  그리스인의 정신은 자유다. 작열하는 태양과 쪽빛 바다 ‘에게 해의 진주’그리스는 자유정신의 본향이다. 이 소설 주인공 아렉시스 조르바는 동명의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여 자유혼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작품은 30대 중반의 ‘나’ 라는 인물이 60대 중반의 조르바와 우연히 만나 짧은 기간 동안 함께 지내며 삶의 의미와 참된 자유를 깨닫는 과정이 1인칭 형식으로 전개 된다. 스토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 부스러기와 원고 나부랭이에 묻혀 살던 지식인 ’나‘는 크레타 섬으로 떠나는 부두에서 초로의 조르바와 우연히 만나 동행한다. 격동의 세월 속에서 삶의 현장과 는 동떨어져 관념의 세계에만 빠져 살던 ’나‘는 큰맘 먹고 몸으로 부대끼는 삶을 체험하기 위해 크레타의 갈탄 광을 찾아가던 중이었다.     

   산투리를 즐겨 연주하고 춤추기를 좋아하는, 자유혼의 소유자 조르바의 거침없는 언행에 ‘나’는 점점 더 빠져들면서 관념의 틀에 갇혔던 삶을 확장시켜 나간다. 조르바와 호흡하면서 향기로운 자연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껴보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몸에 희열을 불어 넣기도 하고, 육감적인 여인과 육체의 향연을 벌이기도 한다. ‘영혼과 육체는 하나’라는 사실에 눈 뜨게 되는 것이다.

   갈탄광 작업이 시들해 지자 조르바는 남은 돈을 몽땅 털어 높은 산에 있는 수도원 소유의 나무를 베어 팔아먹을 궁리를 한다. 우둔한 수도승들을 꼬드겨 나무를 헐값에 매입한 것도 좋았고 가파른 경사에 고가 케이블을 설치하여 손쉽게 목재를 수송한다는 전략도 멋들어지게 돌아갔으나 경사도를 잘못 선정하는 바람에 야심 찬 프로젝트는 눈앞에서 풍비박산 나버린다.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예기치 못한 파탄에 망연자실 하던 ‘나’와 조르바는 이내 허망함을 떨쳐 버리고 함께 어우러져 한바탕 춤을 추며 모든 것을 훨훨 벗어버린다. 그러고는 칼로 벤 듯이 깨끗이 헤여 진다.

   헤어진 지 몇 해 후에 ‘나’는 기막히게 아름다운 녹색 암석을 발견 했으니 당장 오라는 조르바의 전보를 받는다. 돌덩이 하나 구경하려 먼 길을 달려가는 건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지 앉는다. 다시 세월이 흘러 조르바는 산투리를 ‘나’에게 유물로 남기고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조르바의 분신과도 같은 산투리는 자유가 아니던가.‘

 

 

   자유인 조르바

   조르바는 한마디로 괴짜다. 이리저리 머리 굴리지 않고 요모조모 따져 보지도 않은 채 그냥 확 저질러버리는, 그러고서 결과야 어떻든 손 털고 일어나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 버리는 ‘대책 없는’ 인간이다. 어찌 보면 시원시원한 사나이 이고, 달리 보면 거친 ‘야만인’이다. 조르바의 매력은 매사를 처음 대하듯 하며 날마다 새롭게 일상을 펼친다. 모든 사물을 새삼스럽게 놀라고, 감동받고, 궁금해 한다. 평생 ‘나’는 책만 끼고 살며 이성에 묶여 살다 조르바의 이런 야성에 신선한 충격을 받고 조르바의 공갈 비슷한 태도와 격렬한 말투에 불쾌감은커녕 묘한 호감을 느끼고 동행하기로 마음먹는다. 이제까지 맛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이다.

   조르바는 통념으로부터 자유롭다. 육십 줄을 넘긴 영감이지만 그는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원초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

 

 

   우상으로부터 자유

   조르바는 우상으로부터 자유롭다. 신을 부정 하지는 않지만 형식과 교리를 갖춘 종교에 예속되지 않는다. 인간보다 신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계명에 틀에 얽매이는 삶은 거부한다.

   조르바는 신성을 거부하고 틀에 갇혀 도덕선생 노릇이나 하고 있는 신을 해방 시킨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무소불위 전지전능 하지만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전지전능 하지도 않고 인간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도 않다. 죽음을 초월해 있다는 사실 외에는 인간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의 본성과 모습을 고스란히 닮았다. 제우스는 탁월한 통치술과 화려한 여성 편력을 보여주고, 여왕 헤라는 바람난 남편을 쫒아 다니며 투기나 일삼는 이웃 집 아줌마로 그려진다.

   조르바가 기성 종교를 마뜩찮게 여기는 이유도 성직자들의 위선에 있다. 겉으로는 교리와 계명에 충실한 듯 보이지만 속은 물욕과 허위의식에 갇혀 있는 성직자들에게 환멸을 느낀다. 조르바는 나무를 매입하기 위해 올라간 수도원의 수도승들을 위선적인 작태를 보고 역겨움에 침을 뱉는다.

 

 

   이념으로 부터 자유

   모든 틀을 거부하는 조르바는 이념으로 부터도 자유롭다. 격동의 세월을 안일하게 비켜가지 않고 치열하게 맞서 싸웠지만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사회주의나 맹목적인 집단의식에 매몰되지 않았다. 아무리 고상한 이념일지라도 거기에 빠져들지 않는다. 얽매이고 빠져들고 사로잡히는 순간 자유혼은 질식하기 때문이다. 조르바는 이념 자체를 불안전한 인간의 소산으로 보고 있다.

 

 

   금욕으로부터 자유

   조르바는 바람둥이이다. 그리스인 ‘카사노바’다. 예순을 훌쩍 넘겼음에도 치마만 두르면 나이를 불문하고 껄떡거린다. 결혼을 몇 번 했느냐는 질문에 ‘정직하게 말하면 한 번, 비양심적으로 치자면 천 번, 2천 번, 3천 번 쯤 될 것인데, 수탉이 장부 가지고 다니며 한답니까? 라고 너스레를 떤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예순 다섯의 조르바는 케이불 설치에 필요한 물품 구입 차 도시에 갔다가 술집 아가씨한테 홀려 돈 다 털어먹고 질펀하게 놀다가 ’할배‘라는 말에 열 받아서 머리를 까맣게 물들이는 주책바가지다.

   조르바는 금욕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한다. 먹고 싶을 때는 먹고, 자고 싶을 때는 자고, 욕정을 느낄 때면 즉시 풀어 버린다. 나이나 신분에 속박 당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피가 덥고 뼈가 든든한 사나이다.

 

 

   욕망으로부터 자유

   조르바는 욕망을 탐하되 집착하지는 않는다. 여자를 밝히되 질퍽거리지 않는다. 여자뿐만 아니라 매사에 그렇다. 열정을 쏟다가도 때가 되면 칼로 무 베듯이 잘라버린다. 구질구질하게 물고 늘어지는 법이 없다. 조르바 식 욕망 퇴치법은 비결은 자유혼이다.

   진정한 자유란 이런 게 아닐까. 욕망과 집착을 훌훌 털어 버릴 때 자유를 얻게 된다. 돈으로도 살 수 없고 권력으로도 누릴 수 없는 것이 자유이다. 밀로스 포먼 감독의 <뻐꾸기둥지 위로 날아간 새>도 자유를 주제로 한 영화이다. 주인공 맥머피는 현실의 부조리를 참지 못하는 반항아다. 노역을 피하기 위해 정신병을 가장했다가 진짜 정신병원에 끌려왔다.

   반항하는 그를 병원은 끔찍하게도 전두엽을 수술해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서슬이 시퍼런 권력 앞에 자유는 그 누구에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나’는 조르바에게서 자유혼을 발견한다. 가진 것을 다 날려 버리는 순간 예기치 않은 해방감을 맛본다. 외적으로는 참담하게 패배했지만 내적으로는 승자의 긍지와 환희를 느낀다. 욕망으로부터 탈출인 동시에 자유인이 된 것이다. 욕망을 회피하지 말고 욕망과 맞서 굴복 시켜라! - 이것이 조르바의 욕망 퇴치법이다. 

  조르바의 자유정신은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