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박완서 작가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고

안규수 2018. 4. 17. 03:34


 

  이 책의 제목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의존명사로 글 행간에 숨겨진 작가의 심경을 암시하고 있다. 제목에서 책 내용에 흐르고 있는 무엇인가 강열한 작가의 의지가 느껴진다. 모든 장르의 문학이 글의 제목과 첫 문장에서 작품으로서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작가는 88년 여름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는다. 남편을 떠나보낸 지 3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다. 이 책의 전반부는 하느님을 향한 처절한 원망의 몸부림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삶과 존재 벽 앞에서 발버둥치는 그녀의 비통하고 절망적인 언어들은 어느 순간 삶과 죽음, 신과 영혼, 고통이 자신의 죄 때문임을 깨달음으로 바뀐다. 속죄는 곧 회개인데, 회개는 이 책에서 느낀바와 같이 절망과 비통에서 비롯된다. 작가는 이 책 서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장 강한 부정은 가장 강한 긍정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만일 그때 포악을 부리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분조차 안 계셨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끔 생각해 봅니다만 살긴 살았겠죠. 사람 목숨이란 참으로 모진 거니까요. 그러나 지금 보다 훨씬 더 불쌍하게 살았으리라는 것만은 환히 보이는 듯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이 한 마디에서 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지, 인간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이 말은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수도원에서 점심으로 카레라이스를 먹은 것이 탈이 나서 화장실 변기 앞에 무릎 꿇고 앉았을 때, 문득 하나님의 계시가 들려오고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하나님의 실체를 깨닫게 되는데 있다. 곧 변심이다.

 

  “주여, 나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력과 지력과 모든 의지와 내게 있는 것과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주소서. 나의 고통까지도,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주셨나이다. 주여, 이 모든 것을 당신께 도로 드리나이다.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오니, 온전히 당신 의향대로 그것들을 처리 하소서. 내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소서. 이것이 내게 족하나이다.”

 

  이 기도를 통해 작가 자신의 내면에 가득한 모든 것을 비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다아는바와 같이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비움 미학의 극치이다. 자신을 비워야 그 자리에 주님이 들어오신다는 진리, 곧 자신을 비우니 비로소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과 안식을 얻는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삶이 감사로 넘쳐난다.

   그런대 회심의 장소가 왜 하필 화장실 변기통일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하나님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임재 하신다는 것과, 작가가 자나 깨나 아들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 아들의 못 된 버릇을 기억해 낸다. 그것은 아들은 생전에 아침 화장실을 보고 난 뒤 변기 물을 내리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그 일은 그에게 곧 아들이 싱싱하게 살아 있는 생명의 실존으로 마음속에 남는다. 그래서 작가에게 화장실은 본능적으로 생명의 힘이 살아 꿈틀대는 삶의 현장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된다.

   한편 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까지는 조력자가 있었다. 수도원의 조 테레사 수녀이다. 그가 절망 앞에서 하필 왜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하고 항변할 때 왜 당신이라고 그런 일을 당하면 안 되는가? 라는 당돌한 반문을 던져 딱딱하게 굳어진 그 마음에 균열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이 책 말미에 문학평론가 황도경은 작가의 내면적인 기록, 저주와 분노와 포악으로 일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글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리고 이 글이 박완서 문학의 중요한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이 글이 단지 어미로서 아들을 잃은 비통함을 토로하고 기록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삶과 죽음 신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도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은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이 아니라 그 슬픔이 이끌어 가는 생명과 존재에 대한 인식의 깊이에 있어서 우리의 주목을 요한다.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생명의 허망함에 대하여,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되는 삶의 길과 신의 부르심에 대하여, 신의 존재 방식에 대하여, 그녀의 질문은 계속되고 결국 이 과정에서 그녀는 죽음으로 이끌림에서 다시 삶 속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하나님은 침묵하는 분이 아니고 생명의 모든 행위, 그리고 생명의 모든 움직임 안에 살아 계시면서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슬픔을 행복으로 바꾸어 준다. 생명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작가 박완서가 가슴이 미어터지는 아픔과 통곡 속에서 얻어낸 이 깨달음은 곧 우리도 겪어야할 과정인지도 모른다. 이 깨달음이 우리들 모두, 내 자신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박완서(朴婉緖 / Park-Wansuh)

 

출생 : 19311020, 경기도 개풍군

사망 : 2011122(79)

첫 작품 : 나목 (1970)

1970년 잡지 '여성동아'의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중산층과 여성의 삶을 주로 다룬 많은 작품을 남겼다.

전쟁 기간 중에 오빠와 숙부가 목숨을 잃고 말았으며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미8PX의 초상화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다. 이후 서울 동화백화점에서 일하다 같은 동화백화점 측량기사였던 서울토박이 집안 출신인 호영진과 1953년 결혼했으며, 14녀의 자식을 두었다.

작가의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재미있다. 하나는, 상금 50만 원을 타서 남편한테 나도 돈 벌어왔다고 자랑하고 싶었고, 둘은,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고생만 하고 막상 공모에서 떨어지면 가족에게 창피하니까 자식들 몰래 학교 간 뒤나 밤에 주로 글을 썼는데, 졸릴 때 자신을 격려해준 것이 바로 50만 원과 엄마였다고 한다.

작가는 천부적인 작가로서의 소질을 타고 난 분이다. 처음 쓰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습작 없이 한 번에 장편소설 1,300매 분량을 써내서 공모에서도 한 번 만에 바로 당선됐다는 점이 그렇다.

나목으로 등단하였을 당시 작가의 나이는 39세였다. 당시 원고를 받았던 기자도 이 나이의 전업주부가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것을 도저히 믿지 못해 직접 찾아와 집필 당시 적어둔 메모 등을 보고 돌아갔다고 한다.

1984년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았다. 1988년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고, 3개월 뒤 외아들이 교통사고로 25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이후 큰 슬픔에 빠져 묵주를 집어던졌다고 한다. 이때의 절망은 그야말로 극심했으며, 큰딸의 회고에 의하면 아들을 앗아간 절대자에 대한 분노로 불교로 개종하겠다고 작가가 펄펄 뛰었다고 한다. 이 때 쓴 일기 묶음이 그녀의 절망과 고통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한 말씀만 하소서이다. 2011122, 경기도 구리시에서 담낭암 투병 중 향년 80세로 영면하였다.

박완서의 소설은 자전적인 체험의식을 바탕으로 해서 쓰인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전부의 문학이 그런 것은 아니나, 작가 자신의 일생을 바꿀 정도로 가장 강렬한 경험이었던 6.25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 유독 많다는 점을 들어서 '소설'이라기보다는 자전적 회고에 가까운 '수필형 소설'이라는 평가가 있기도 하다.

여기서 체험의식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내가 하고 있는 수필문학의 기본 구조이다. 소설이 픽션이라면 수필은 논픽션이다. 수필의 미학성을 간결하게 말한다면 맛과 멋으로 표현한다. 수필은 짧은 분량의 산문문학으로서 전통적으로 글이 맛과 멋을 추구하는 장르라는 점에서 타 장르와의 비교를 불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