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규수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을 읽고/이상열
안규수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을 읽고
이상렬
병원에서 퇴원하고 고향 선영을 찾아뵙고 옛집에 들렀다. 훌쩍 자란 느티나무가 반갑게 맞이한다. 둥치가 내 몸통만하고 가지가 하늘을 찌를 듯 무성하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가 손수 심은 나무, 아버지 가신지 무려 반세기가 흘렀지만 그동안 억척스럽게 성장하여 독야청청하다. 나무는 주인을 얼마나 기다렸을까. 눈 비 바람 견디고, 홀로 빈집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눈물겹도록 대견하다. 가족과 함께 웃고 울면서 지낸 풋풋한 순간들이 구름처럼 머릿속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꼬맹이 시절 모처럼 시장에 가신 어머니가 한낮이 기울도록 돌아올 기척이 없을 때, 시간은 왜 그토록 더딘 걸음을 친 것일까? 동구 밖까지 나가서 내다보는 골목길, 저만큼 시간은 연신 기지개만 켜고 있었다. 그 서성거리던 시간이 눈 한 번 깜박거릴 정도의 짧은 순간인 것을 이 나이 되니 알 것 같다. 삶은 시간과 동행하거나 겨루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규수,<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中에서
수필, 본향 찾기
병원에서 퇴원하고...
대관절, 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응급시술을 할 만큼 급하고 목덜미 잡게 했던 병! 큰일 날 뻔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나왔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의 여정이었다. 큰일 겪고 나니 만사가 여사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가 찾은 특별한 곳이 있다. 고향이다. 고향의 옛집, 고향의 느티나무, 고향의 골목길...그리고 부모, 이 모든 것이 닿아있는 곳이 있다. 고향보다 더 본질적인 곳 본디의 고향, 본향! 수필은 본향을 의식하고 말하는 글쓰기다. 작가는 말한다. ‘존재가 영원하지 않은 것은 순간순간 변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럼, 변함이 없는 것은 영원을 의미한다. 작가는 그것을 알고 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예비했던 거처(요14:3)’ 바로 그곳! 그곳까기 가서 문인방 설주라도 한 번 만져보고, 그것까지 다루고 상상하는 것이 수필이다.
쾌유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