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편지
세상에서 믿는 자로 산다는 것
안규수
2019. 11. 2. 13:49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다니엘과 느부갓네살 왕의 결정적인 차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시어 인도해주시는 양이냐,
목자 없이 방황하는 양이냐 차이이다.
그랬더니 4절과 같은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는 것 아니겠는가?
이 말씀은 다윗의 노래이기도 하지만 다니엘의 노래이기도 하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시 23:4 (오늘의 나눔 본문중에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멋진 하루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 아침은 이찬수 목사님의 <세상에서 믿는 자로 산다는 것> 이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다니엘과 느부갓네살 왕에게도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 사 53:6
다 양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죄성을 가진 인간을 규정하는 성경의 표현은 ‘양’인데, 양의 특징은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이다.
이 부분을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다니엘과 느부갓네살 왕은 공통적으로 둘 다 양 같은 존재다.
다니엘은 인격이 훌륭하고, 느부갓네살은 미숙한 것이 아니다.
예외 없이 다 내버려두면 제 갈 길로 가는 양 같은 존재다.
그런데 무엇이 다니엘과 느부갓네살의 차이를 만들었는가?
나는 그 차이를 시편 23편 1절에서 찾았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시 23:1
다니엘과 느부갓네살 왕은 다 내버려두면 혼미하고 헷갈려서 헤매는 양 같은 존재다.
그러나 그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다니엘에게는 인도하시는 목자가 있었고
느부갓네살 왕에게는 그 목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에게 꿈을 해몽하라는 명령을 했을 때도
그 자리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고 대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목자에게 물어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다니엘과 느부갓네살 왕의 결정적인 차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시어 인도해주시는 양이냐, 목자 없이 방황하는 양이냐” 이 차이이다.
그랬더니 4절과 같은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는 것 아니겠는가?
이 말씀은 다윗의 노래이기도 하지만 다니엘의 노래이기도 하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시 23:4
다니엘서 전체가 이 말씀의 구현 아닌가?
우리 인생은 어떤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하고 있는가?
스스로 “나는 스스로 내 인생을 개척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나 혼자도 잘하고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느부갓네살이다.
내가 옥한흠 목사님을 존경하는 것은 그 분이 흠 없는 천사여서가 아니다.
삼십 대 초반부터 10년 동안 가까이서 목사님을 지켜봤는데, 왜 인간적인 흠이 안 보였겠는가?
그것도 비판 정신이 왕성하던 삼십 대 때 말이다.
그러나 그 분에게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내 눈으로 보기에 ‘목사님 지금 조금 위험하신데?’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느 날 다시 보면 어느새 제자리에 와 계셨다. 절대로 선을 넘지 않으셨다.
은퇴하실 때까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지 않으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그 분 역시 제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양에 불과한 인생이지만
목자 되신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다독다독 인도하심을 받아 결코 선을 넘지 않는 삶을 사신 것이다.
이 각도로 자신을 한번 조명해보라. 당신은 다니엘인가, 느부갓네살 왕인가?
교회는 다닌다면서 느부갓네살처럼 목자에게 묻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회개는
내 맘대로 살아서 망가진 삶에서
하나님이 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이루는 것이 많다.
다니엘처럼 일일이 주인의 결재를 받으면 오히려 뒤처지는 것 같다.
그래서 주님께 묻는 것은 생략한 채 내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무서운 것은 많은 크리스천이 다니엘로 시작해서 느부갓네살로 전락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분명 다니엘로 시작했다.
그래서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직분자가 된 것 아닌가?
분명히 다니엘로 시작했는데 교회에서 너무 유명해지고,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자랑거리가 많아지다 보니 슬슬 입만 열면
자기 치적을 자랑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면
다니엘에서 느부갓네살로 변질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점검해야 한다.
세상에서 믿는 자로 산다는 것. 이찬수 / 규장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요한복음 10장 11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 시편 9편 10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 잠언 3장 5, 6절
하나님, 저의 목자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이 저를 이끌어주시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해주셨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내 능력과 힘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 순간 주님이 나의 목자되심을 고백하며 따르는 양이 되게 하소서.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삼상 12:24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미국에서 평생 일에만 집중해서 살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남자는 일만 하느라 결혼도 하지 않았고,
가족들은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나 그는 혼자서 인생의 말년을 보냈습니다.
몸이 약해지고 세상을 떠날 날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낀 남자는
변호사를 찾아가 유서를 맡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장례식을 새벽 4시에 치러주시고, 이 유서는 그날 사람들 앞에서 공개해주십시오.”
몇 달 뒤 남자는 세상을 떠났고 변호사는 그의 말대로
새벽 4시에 장례식을 치르려고 지인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지만 새벽 4시의 장례식에 찾아온 사람은 단 4명뿐이었습니다.
하객 앞에서 변호사는 남자의 유언을 공개했습니다.
“이 새벽에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 참석한 친구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담아
내가 평생 모은 재산을 골고루 나눠주십시오.
이것이 나의 유언입니다.”
4명은 각각 10만 달러씩을 받았지만
그들은 고인의 이름으로 사회 곳곳에 환원을 해 끝까지 우정을 지켰습니다.
진심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귀찮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항상 진심을 가지고, 예배를 위한 어떤 일도 최선을 다해 섬기십시오. 아멘!!
주님! 단 한 번의 예배도 마음과 열정을 다해 드리게 하소서.
다른 무엇보다도 예배가 먼저인 신앙생활을 합시다.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