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편지

노아처럼 그냥 방주를 짓자!

안규수 2020. 8. 1. 15:14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오늘도 새 하늘, 새 호흡, 새 힘, 새 기쁨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0^

 

“이해가 안 돼서 못 믿겠어. 하나님 보여주면 믿지”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당연한 이야기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머리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이게 맞는 말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해를 통해서 믿음에 이르는 것일까?

믿음을 통해서 이해에 이르는 것일까?

요즘엔 주소만 알면 내비게이션으로 정확히 찾아갈 수 있지만,

예전에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는 꼭 팩스로 미리 약도를 받았었다.

약도를 보고 따라갔다.

길을 잘 모르지만,

약도가 맞는지 안 맞는지 가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믿고 가는 것이다.

가보니까 맞다.

그러면 그다음에 갈 때는 믿고 가는 게 아니라 알고 가는 게 된다.

 

많은 사람이 이해를 통해서 믿음에 이르는 것을 생각하지만,

사실은 먼저 믿고 이해가 되는 것이다.

약도를 받아들고 믿으려 하지 않고 ‘모르는 길인데 이 길이 맞을까?’

의심하면 결국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오늘의 나눔 본문 중에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멋진 하루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 아침은 김동호 목사님의 <날기새 : 힘든 세상에서 천국 살기> 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창세기 6:13-17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전도를 하다 보면

“이해가 안 돼서 못 믿겠어. 하나님 보여주면 믿지”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당연한 이야기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머리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이게 맞는 말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해를 통해서 믿음에 이르는 것일까? 믿음을 통해서 이해에 이르는 것일까?

요즘엔 주소만 알면 내비게이션으로 정확히 찾아갈 수 있지만,

예전에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는 꼭 팩스로 미리 약도를 받았었다. 약도를 보고 따라갔다.

길을 잘 모르지만, 약도가 맞는지 안 맞는지 가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믿고 가는 것이다.

가보니까 맞다.

그러면 그다음에 갈 때는 믿고 가는 게 아니라 알고 가는 게 된다.

 

많은 사람이 이해를 통해서 믿음에 이르는 것을 생각하지만,

사실은 먼저 믿고 이해가 되는 것이다.

약도를 받아들고 믿으려 하지 않고 ‘모르는 길인데 이 길이 맞을까?’

의심하면 결국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창세기 6장은 노아의 이야기다. 노아 하면 생각나는 중요한 단어가 있다.

‘의인’. 하나님은 노아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칭하셨다(창 6:9).

그러면 노아에겐 죄가 없었을까? 실수가 없었을까? 아니다.

우리가 잘 알지 않은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로 잠든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노아를 의인이라 하셨을까?

 

행함으로만 보면 세상에 온전한 의인은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로마서의 말씀이 맞다.

그러니 노아가 행함에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의인이었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뭘 보고 그렇게 좋으셔서 “노아는 참 좋아, 의인이야. 내 마음에 들어”라고 말씀하셨을까?

 

하나밖에 없다. 노아는 하나님을 믿었다.

믿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다.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상식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성경을 보니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노아 입장이라면 어땠을까?

하나님께서 뜬금없이 “이 세상에 죄가 가득 차서 내가 홍수로 다 쓸어버릴 거야.

그러니 너는 가서 방주를 지어”라고 말씀하신다면 쉽게 믿어졌을까?

그런데 노아는 그 말씀에 토 달지 않고 순종해서 방주를 지었고 구원을 얻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그냥 따르면 되는 것 아닌가?

노아처럼 그냥 방주를 지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쉽지 않다.

죄로 인해 타락한 우리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범죄하고 타락하여 우리의 생각, 가치관, 인생관

곧 하나님이 본래 우리에게 심어주신 형상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세상 식이 있다.

세상의 길이 있고, 세상의 꾀와 요령이 있다. 그것은 만만치 않다.

대단하고 힘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 길로 간다.

다들 그 길로 가는데 나만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딴 길이시지 않은가?

우리에게 편하고 익숙한 세상의 꾀와 법과 식과 요령을 거부하고

홀로 하나님의 식과 법을 고집하면서 산다는 건 쉽지 않다.

 

내비게이션에 따라 운전하다 보면 재미있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전 보지도 못한 이 사람 말도 믿고 다니는데 하나님을 못 믿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못 믿을까?’

그리고 하나님께 이야기한다.

“하나님, 그냥 말씀하세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게요. 가라고 하시면 가고, 서라고 하시면 서겠습니다.”

그게 믿음의 생활인 줄을 믿는다.

그러면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 구원의 방주가 지어지는 줄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별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노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그 마음을 기뻐하시고

의인이라고 칭해주시는 분이시다.

 

날기새 : 힘든 세상에서 천국 살기, 김동호 / 규장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 로마서 4장 18~21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히브리서 11장 6절

 

주님, 노아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세밀한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히 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미국 텍사스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예이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목장 경영에 영 소질이 없었던 예이츠는 해마다 부채가 늘어 감당할 수 없는 상태까지 이르렀습니다.

은행은 예이츠의 농장을 조금씩 압류했고 남아있는 땅은 집과 마당, 그리고 약간의 목장이었습니다.

버는 돈마다 빚을 갚아서 생활도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히 이어가던 예이츠에게 하루는 유전개발회사가 찾아와

높은 확률로 예이츠의 목장에 유전이 있을 것 같다며 시추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예이츠는 시추를 허가했고

다행히 압류 당하지 않은 유일한 목장에서 유전이 터졌습니다.

예이츠의 이름을 따 ‘예이츠풀’로 불리는 이 유전은 하루에 8만 배럴의 석유를 생산했고

이로 인해 예이츠는 하루에 수억 원씩 30년이나 받는 큰 부자가 됐습니다.

땅 밑의 충분한 석유를 몰랐기에 예이츠의 삶은 불행했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는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구하는 대로 주실 주님은 믿지 않고 세상의 방법에만 목을 매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넘치게 주시는 주님께 큰 믿음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십시오. 아멘!!

 

주님!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경험하게 하소서.

굳건한 믿음으로 필요한 모든 것은 주님께 간구합시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