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홀로 걷는다
가을이다. 대지를 녹이던 폭염도 계절의 흐름 앞에 무릎을 꿇고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나는 유난히 끓는 더위를 감내하며 한여름을 보냈다. 내 평생에 이런 혹독한 여름은 처음 겪은 듯하다. 거기에 코로나19로 인한 가혹한 현실 앞에서 삶의 의미가 무색해지고 모든 일이 헛수고가 아닌가 하는 자조적인 푸념이 흘러나왔다.
가을이 성큼 다가오자 육체나 정신적으로 내 속에서 어떤 변화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해외여행은 물리적으로 갈 수 없으니 제주도라고 가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일어났다. 사람은 여행을 떠난 후보다 계획할 때 더 행복하다. 이런 보상을 ‘희망효과’라 한다나.
나의 취미는 여행이다. 젊어서는 우리 생활 형편으로는 과분한 취미여서 아내에게 늘 미안했다. 토요일이 되면 친구들과 1박 2일 산행을 다녀와야 직성이 풀리고 여름 휴가철이 되면 가족과 함께 중국이나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물론 아내와 함께 하는 여행이 나의 희망이다. 그러나 아내는 둥지를 못 떠나는 어미 새처럼 죽지로 삶을 끌어안고 꼼짝하지 않았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두고 단 하루도 마음이 편하게 집을 비울 수 없는 형편이어서 그런다.
가을이 깊어가는 10월 말 제주 여행을 떠났다. 제주 절물 자연 휴양림을 홀로 걸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삼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산림욕을 즐겼다. 오름 정상에 오르니 시원하게 트인 전경이 펼쳐졌다. 분화구 능선을 한 바퀴 돌고 나자 몸과 마음이 한결 상쾌했다. 여행은 미지의 꿈을 향해 걷는 길이다. 일상의 번거로움에서 자신을 해방해 보려는 욕구의 발로이기에.
오름 탐방은 ‘웰니스’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웰니스는 육체, 정신적 건강의 조화로 즐거운 삶을 찾는 참살이에 건강, 행복을 더한 의미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친구도 만날 수 없고 집에만 갇혀 있다가 오름에 올라 시원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니 창공을 나는 새처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 사려니숲길을 걸었다. 한라산 정기를 마시며 노루와 함께 걸었고, 휘파람새도 경쾌하게 나무 사이를 휘젓고 다니며 함께 걸었다. 아이들도 걸어가고 어른도 함께 걷는다. 삼나무도 서어나무도 함께 걷는다.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린다. 풍경을 통해 새로이 눈이 떠지고 모든 사물을 끌어안는다. 풍경을 사색으로 윤색(潤色)할 수도, 한 곳으로 응집할 수도 있게 된다. 숲길을 걷다 보면 자유와 공생의 조화, 자연의 심술도 버티는 끈질긴 생명력에 매료된다.
일출봉을 뒤로 하고 광치기 해변을 걸었다. 삶의 지혜를 품은 바다, 오늘은 화가 단단히 난 표정이다. 먼 데서 하얀 갈기를 세우며 꿈틀꿈틀 달려와서는 벼랑이고 바위고 가리지 않고 사정없이 때린다. 그러면 물기둥이 하얗게 솟아 나를 덮칠 듯 달려들었다. 섭지코지에 다다르니 그곳에서도 파도는 검은 현무암 바위를 인정사정없이 물어뜯고 있었다. 인간의 탐욕으로 오염시키는 것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다가 무서운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사흘째 걷고 또 걷는다. 걷는 길은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 싸움이다. 상념은 사라지고 마음은 그지없이 호젓하다. 걷는 것 자체가 명상이고 힐링이다. 기분이 상쾌해지면서 머릿속의 바람개비가 돈다. 신비의 일출봉이 의젓하게 버티고 있다. 아름다움은 멀리 있는 추상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구체란 말이 떠오른다. 어느 수필가는 이 느낌을 ‘도상의 황홀경’이라 이름 붙였다.
제주에 갈 때마다 거품처럼 사라질지도 모르는 감상을 하나하나 메모해 두었다가 마지막에 한 편의 글로 갈무리하곤 했다. 협제해수욕장 앞바다의 5색 무지갯빛 바다, 한라산 선작지왓 초원의 털진달래꽃, 높푸른 하늘에 우뚝 솟은 백록담 남벽, 그런 아름다운 풍경이 스멀스멀 떠 오른다. 여수(旅愁) 어린 상념들이 엉겅퀴 솜털처럼 산들산들 흩날리다 글 속으로 기어들어 온다.
여행은 끝은 언제나 집이다. 제자리로 돌아오니 답답한 일상은 그대로다. 부근 힐링 숲길을 걸으니 갈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단풍잎이 지고 가을이 저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쉼 없이 걷는 길이 곧 인생길, 하나의 궤도에 어쩔 수 없이 실린 채 그 어디론 가고 있다. 그리움이나 회한, 이 모든 게 걸으면서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도 부끄럽고 욕이 아니다. 이것은 누구나 거쳐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나무는 옷을 훌렁 벗어 버리고 홀로 외롭게 서 있다. 숲은 적막이 흐른다.
봄이 오면 언 땅을 비집고 새 생명의 움이 대지 위로 기어오르듯…. 삶에는 연습이 없다. 그 일회성은 경건하다. 삶은 누구에게나, 어느 순간에도 멀고 험한 첫 길이고 돌아갈 길은 없다. 이처럼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흘러가는 것이리라. 나는 오늘도 홀로 걷는다. 스칼릿의 독백처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