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되지 못한 그 날의 이야기
이태 전 봄 아들이 거주하는 베트남 호찌민시를 방문했다. 이튿날 전쟁기념관에 들렀다. 이곳 공식 명칭은 전쟁기념관이 아니고 ‘전쟁증적박물관’이었다. 증적(證跡)은 증거가 될만한 흔적이나 자취를 뜻한다. 즉 역사가 남긴 자취를 통해 전쟁을 되새기고 기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베트남은 항미 전쟁이라고 부르는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다. 세계 최강 미국을 이긴 입장에서 그 자부심을 ‘기념’이라는 단어를 쓸만하다. 그러기보다는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얼마나 많은 것 들을 앗아갔는지 자자손손 잊지 않기 위해서 전쟁기념관 대신 전쟁증적박물관이라는 명칭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 전시실에는 반세기도 넘은 전쟁의 상처가 시간이 정지된 채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사진의 가치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불러내는 데에 있다. 네이팜탄에 검게 타버린 시체, 고엽제로 인해 사산된 태아를 포르말린에 넣어 보존한 병, 전쟁으로 죽은 사람의 수, 베트남에 뿌려진 포탄과 실탄의 수, 그들이 ‘더러운 전쟁’이라 부르는 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군인이 투입되고 죽었는지, 그로 인해 베트남이 얼마나 초토화되었고, 얼마나 많은 베트남인이 죽고, 현재까지 고통받고 있는지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중에는 우리나라가 파병한 한국군이 작전 중 학살한 민간인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사진 속에는 수십 구의 민간인 시체가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총을 들지 않은 사람을 쏜다는 건 이미 전쟁이 아니다. 그건 살인이다. 전쟁의 목적과 경계를 넘어선 일이기 때문이다. 기억되어야 할 죽음과 기억을 지우려고 애쓰는 미국인 관람객 가운데에는 초라한 내 모습도 있었다.
1968년 4월 부산항에서 미군 수송함에 몸을 싣고 베트남으로 떠났다. 부두에는 환송 나온 수많은 가족 친지와 학생들이 부디 살아서 돌아오라고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이 물결을 이루고, 그 가운데에는 하얀 손수건을 들고 눈물을 훔치던 아내도 있었다.
6일간의 남중국해를 항해 끝에 냐짱 항에 도착하여 백마 28연대 도깨비 부대 S중대에 배치되었다. 베트남 중부 뚜이호아는 남중국해를 끼고 백사장이 수 킬로미터 뻗어 있는 아름다운 해안 도시였다. 그러나 이곳은 베트콩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격전지였다.
근 1년 동안 전투에 참여하여 생사를 넘나드는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살벌한 전쟁터, 조금 전까지 C레이션을 같이 먹던 전우가 총에 맞아 죽고, 어젯밤에 어머니와 애인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훔치던 친구가 포탄에 맞아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현장에서 휴머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투 중 전우가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인간으로서 이성을 상실한다. 오직 적개심만 남아 있을 뿐이다.
베트콩은 항상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법으로 아군을 괴롭혔다. 그러니 뚜렷한 전선도 없고, 베트콩과 민간인을 구별하기란 더욱 어려웠다. 1968년 가을쯤으로 기억하고 있다. 인근 중대에서 야간 매복 작전으로 30여 명에 가까운 베트콩을 사살한 전과가 있었다. 날이 밝아 사상자를 수습하고 보니 인근 마을 주민이 대부분이었다. 신분만 민간인이지 그들 모두 베트콩이었다.
정글에서 작전 중에 미군 수송기가 뿌연 안개 같은 것을 자주 살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낙엽을 지게 하는 인체에 치명적인 고엽제라는 화학물질이었다. 나는 30대 중반부터 고엽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앓기 시작한 당뇨병과 고혈압은 현재 진행형이다. 3년 전 당뇨합병증으로 가벼운 뇌경색이 발병했다. 국가유공자가 되고 고엽제 피해자로 분류되어 정부의 치료를 받고 있지만, 그날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귀국 후 한동안 치열한 전투 현장의 악몽이 발현되는 트라우마로 밤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밤새도록 그 지옥 같은 바다를 떠다녔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창밖에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고, 두렵고 가슴 아픈 참혹한 광경만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이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국가는 경부고속도로를 만들고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매월 꼬박꼬박 보내 준 돈을 모아 문전옥답 서 마지기를 장만하여 살림살이에 큰 보탬이 되기도 했다.
전쟁증적박물관에서 전쟁의 끔찍한 실상을 보는 순간 그동안 지켜온 나의 자부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잊히지 않는 그 날의 일들은 달리 생각해 보면 내 잘못이나 죄가 아니다. 그럼 누구의 죄일까. 이 말을 곱씹을수록 의미가 다르게 느껴졌다. 너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지 않냐고 묻는 것 같았다. 기억한다는 것은 이미 종료된 일을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봉합될 수 없는 상처를 계속 바라보는 일이다.
이 지구상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없어야 한다. 전투 현장에서 아무런 원한 없이 서로 죽일 수밖에 없었으니 어찌 이런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부조리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두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기억의 틈이 너무 넓다. 우리나라는 베트남전쟁을 ‘경제발전의 계기’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공식적으로 베트남 사람들에게 ‘학살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2018년 봄 베트남 피해자 가족이 보상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참전전우회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들 앞에서 전투복을 입고 ‘우리는 민간인을 죽이지 않았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항의 시위를 했다.
이 전쟁에서 기억에 기대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시 정부에서 말하는 참전의 명분은 우방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같은 분단국인 조국이 도미노 현상으로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 전쟁이 미군의 패전으로 끝났어도 그것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반면에 전쟁을 통해 희생된 민간인들의 진실은 어떠한 명분에도,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을뿐더러 정당화될 수 없다. 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글은 말이 없다. 우거진 숲의 나무들이 자신들이 본 것을 모두 기록하고 말할 수 있다면 역사는 달라질 수 있을까. 과연 그 나무들이 진실을 이야기한다면 감당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