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니에/이민혜
전화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혹시 출판사에서 알려준 번호를 한두 개 잘못 누르지는 않았는지 불안하여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숫자를 눌렀다. 대여섯 번 벨이 울린 후에야 저쪽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저,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머뭇거리며 나를 소개하자마자 들뜬 목소리가 총알처럼 날아왔다. “이게 누고? 내사마 이 양(李孃)을 우에 잊겠노. 우째 까치란 놈이 새벽부터 요란을 떨더라카이. 와, 무지 반갑데이. 으허허허 허허허허!” 저 웃음소리,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도 선배는 저렇게 호탕하게 웃었다.
음대 졸업 후 외사촌 오빠의 권유로 미학과에 학사 편입했다. 새로운 학문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반반인 채 문리대에 등교하던 날, 오빠는 교정의 마로니에 아래서 검정물 들인 작업복 차림의 사나이를 내게 소개했다. “인사해. 나와 군복무를 함께한 친구 C야. 네가 편입한 과(科) 선배니까 잘 모셔.” 작업복 차림의 사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C라 하오. 함께 배우게 되어 반갑소. 작곡을 공부했다지요?” 경상도 억양의 풍부한 성량인 베이스바리톤이었다. 나는 그가 미학보다 성악을 했으면 어떨까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손을 마주잡았다. 당당한 체격에 비해 작고 섬세한 손이었다.
C선배는 졸업반 복학생이었다. 곧 나는 선배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강의실에서의 막힘 없는 외국어 실력도 실력이려니와, 후배들이 교정에서 벌이는 불붙는 논쟁 사이사이에 슬쩍슬쩍 던지는 위트와 해박한 지식은 나를 매료시키고도 남았다. 철학적 사고력이 부족한 나에게 그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학년말 고사가 끝날 무렵 선배가 졸업논문을 제출하자마자 서울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얼마 후 선배는 내 머릿속에서도 떠났다.
이삼 년이 지난 어느 쌀랑한 봄날, 두툼한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경상남도 창녕군? 낯선 주소였다. 발신인 이름은 낯익은데 글쎄 누군지 선뜻 떠오르지가 않았다. “칠 남매를 둔 농사꾼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지방 공무원이 되기를 바랐소. 아버지의 소망을 저버리고 도망치듯 서울로 갔던 내가 또다시 아버지의 기대를 배신하고 농사를 짓겠다며 고향으로 돌아왔소.” ‘아, 그 선배로구나’ 서두를 읽는 순간 C선배의 결기(結氣)있는 입매며 꿰뚫어 보는듯한 형형한 눈빛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직도 내 고향에 여자 중·고등학교가 없소. 공부할 곳이 없어 안달하는, 이 들녘의 꽃 같은 딸들을 외면 할 수가 없었소. 나를 아끼는 이들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학벌에 한 점의 미련이 없다고는 말 못하 오. 그러나 내가 제일 먼저 할 일은 명백했소. 돈 많은 고향 유지들과 뜻을 모아 여자 중·고등학교를 설립 하는 일이었소. 우선 중학교의 문을 열게 되어 여기에 교가 노랫말을 지어 보내니 작곡을 부탁하오.” 편지에는 선배의 고향 사랑에 대한 소신과 근황이 활달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배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그간 갈고 닦은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직장을 택할 것이지, 왜 모두가 앞다투어 떠나는 산골로 돌아간단 말인가. 본인이야 남다른 의지와 보람이 담겨있으니까 낙향의 의미가 크고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나같이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그의 재능 이 아깝기만 했다. 말리고 싶었다. 조만간 삽을 버리고 펜을 잡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영축의 자락모아 긴 가람 바라보니 / 천고에 사연 깊다 유서 오랜 내 고장 / 우리는 이 들녘에 함께 핀 꽃봉오리 / -생략-
그날 밤 선배가 지어 보낸 노랫말을 몇 번이고 음미했다. 짧은 시였지만 그것을 연거푸 읊다보니 고향의 들녘으로 달려간 그의 고뇌와 사랑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아니 나는 그에게 동화되어 갔다. 한 줌의 힘이라도 보태주고 싶었다. 기꺼이 오선지를 꺼내 들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음표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 밤으로 영산의 소녀들이 노래할 아름답고 힘찬 가락이 완성되었다.
지독하리만치 고지식한 선배의 땅 사랑 자연 사랑은 멀리서 지켜보기에도 안타까웠다. 그가 꿈꾸는 두레공동체와 유기농법이, 질(質)보다 양(量)을 목표로 하는 군사정권의 농촌정책과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기가 고수하려는 농촌운동이 뻔히 실패할 줄 알면서도 현장으로 달려 간 사나이! 한 걸음 앞서는 것은 성공하지만 열 걸음 앞서는 것은 실패한다던가. 그의 길은 얼마나 앞섰는지는 모르지만 고난의 연속이었다. 소식이 점차 뜨음해졌다. 나도 연년생인 아이들 육아와 연주자 남편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어 엽서 한 장 띄우지 못한 채 이러구러 5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창녕지역 농민단체 기관지가 우연히 손에 들어왔다. 책을 뒤적거리다가 회원소식란에 눈길이 멎었다. 선배가 중환자라는 기사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어떡하지?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가 있는 시골엔 의료시설도 부실할 게 뻔하다. 마음이 급했다. 전화통화도 안 되었다. 속달을 띄웠다. “선배, 토 달지 말고 즉시 서울로 와서 입원합시다.”
선배는 곧 메디컬센터에 입원했다. 다행히 치료가 잘 되어서 한 달여 만에 퇴원하기에 이르렀다. 퇴원하기 전 날 해질녘이었다. 입원실로 들어서자 선배는 팔짱을 끼고 창가에 서 있었다. 내가 들어서는 기척도 알아채지 못하고 한참 동안 창가에 그린 듯이 서서 떠날 줄을 몰랐다. 저만치 낙산자락이 넘어가 는 햇살을 붙잡고 있었다. “마로니에 씨앗을 구할 수 없을까.” 선배는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을 했다. 그 때 나는 보고 말았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한 이상주의자의 뒷모습. 그렇게 외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가슴이 아렸다. 비록 그는 혁명가로서 농촌운동에 온몸을 불태우고 있지만 아직도 학문에 대한 순수한 동경을 벗어던지지 못했다는 것을 난 느낄 수 있었다. 마로니에는 그의 본향 같은 것!
엄동이 물러가자 꽃바람을 타고 선배에게서 흐뭇한 소식이 날아왔다. 촌사람 속마음까지 읽고 마로니에 씨앗을 보내준 우정에 천 번의 감사를 보낸다며 20여 개의 씨앗이 서너 개만 빼고는 모두 발아되었다는 것과 날로 다르게 쑥쑥 자라는 녀석들을 지켜보는 재미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보약이 된다는 것이었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된 선배가 흙에 매달리면서 우리는 다시 소원(疏遠)해졌다.
우연한 기회에 사진기를 잡게 된 나는, 우리 옛 건축에 담긴 표정에 매료되어 전국의 크고 작은 절집을 두루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셔터를 눌렀다. 청도 비슬산의 아담한 절집을 필름에 담고 상경하는 길이었 다. 구마고속도로였던가. 어쩐 일인지 차창을 스치는 들녘이 낯익게 느껴졌다. 창에 이마를 대고 내다봤 다. 창녕을 알리는 표지판이 다가왔다. ‘아, C선배의 고향! 아직도 이곳을 지키고 있을까. 건강은?’ 헤아려보니 연락이 두절된 지 스무 해가 훨씬 넘었다.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만날 길이 막막했다. 선배가 아직도 옛집에 살 리 만무하고 설혹 살고 있다 해도 집 주소를 까맣게 잊었으니……. 버스가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해 한 시간여를 달릴 때까지 난 선배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추풍령을 넘어 섰을 때, 문득 그럴듯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옳아. 창녕군과 영산면 우체국장에게 선배를 수소문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자. 모르면 몰라도 그 지역 에서는 선배의 이름이 알려졌을 테니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땐 상경하면 곧바로 두 분의 우체국장에게 편지를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급한 일들에 밀려 선배를 찾아보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전혀 생각지 않은 곳에서 길이 열렸다. 엊저녁 무심히 신문의 신간안내를 훑어보는데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도 진보다』라는 책의 작가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어! 이 사람. ‘35년간 흙과 산 농부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쓴 소리’ 라고? 그렇다면 동명이인은 아닐 거야. 선배가 분명해.”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달음에 서점으로 달려갔다. 반백의 머리, 환하게 웃고 있는 주름투성이 얼굴, 책의 저자 사진은 틀림없는 선배였다. 나는 출판사가 문을 열자마자 선배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었다.
“올 봄에 마로니에 꽃이 하도 많이 피었다 아이가. 틀림없이 존 일이 있을 끼다 싶었다. 으허허허.” 선배는 예나 다름없이 호탕하게 웃었다. 수화기를 들 때만 해도 그간의 쌓인 얘기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 져 나올 줄 알았는데 웃음소리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나는 이미 밤새워 그의 저서를 읽은 다음이었고, 그가 젊음을 소진하며 바쳤던 땅 사랑이 역대 정권의 갈팡질팡하는 농촌 정책에 휘둘리며 부단히도 숱한 시련을 겪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왠지 세상을 향해 토하는 울분처럼 들렸다. 연락이 두절되었던 20여 년의 삶을 겨우 몇 마디의 말로 전할 수도 없었다. 선배도 매한가지였나? 유창한 말솜씨는 어디로 가고 한참을 두서 없이 주워섬기다가 문득 조용해졌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독백처럼 울렸다. “이 양은 모를끼다 마. 땅을 망치는 화학비료를 마구 써 제끼지 말자꼬, 땅을 살리는 유기농을 고수하자꼬 내 얼마나 목 터지게 부르짖었나. 어느 날, 느닷없이 평온턴 들판에 세찬 바람이 몰아쳤제. 거 있잖나, 땅 투기바람. 소신과 의리로 뭉쳤던 이웃들이 돈바람 앞에 속속 나자빠지는기라 마. 어처구 니없게도 가장 믿었던 친구마저 땅을 버리는 기라. 막을 도리가 있어야제. 참말로 환장하겄데. 피땀 흘려 쌓은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데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하는 참담함이라니…….” 선배는 그 때의 일이 아직도 생생한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곧 힘주어 말했다. “나라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와 한 번도 없었겄나. 그라믄 땅은 누가 지키겠노? 꾹꾹 참으며 마로니에를 찾아갔제. 놈들을 붙잡고 한바탕 분통을 터트렸어. 이상도 하데. 새 힘이 불끈 솟아나는 기라. 여태껏 마로니에가 나를 쓰러지지 않게 해주고 있다는 것을 이 양은 모를끼구만.”
몰랐다. 나는 정말 모르고 있었다. 교정에서 채취해 보낸 그 밤톨 같은 마로니에 씨앗이 선배의 고향 땅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그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는 것을.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 천고에 사연 깊다 유서 오랜 내 고장 (……)
지난날 영산의 소녀들에게 만들어 보낸 가락이 아슴푸레한 기억 속에서 서서히 되살아났다.
- 에세이스트 동인지 창간호 - - 2008, 올해의 작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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