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닭 우는 소리
푸른 오월입니다. ‘꼬끼오~’새벽을 깨우는 닭 울음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며 창가에 사뿐히 내려앉네요. 이 집에서 2년을 넘게 살면서 아랫마을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그 소리를 처음 듣는 순간입니다. 아랫마을은 연향리로 지금은 도심에 묻혀 있지만, 그 옛날에는 연못이 있어 이름 그대로 연꽃 향기 그윽한 유서 깊은 마을이지요.
그 닭 울음소리는 배고파 엄마를 깨우는 아기 울음소리와 섞이고, 숨을 헉헉거리면서 골목길을 치우는 미화원의 고단한 어깨를 스칩니다. 또 그 소리에 동산 푸른 숲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새들이 요란하게 재잘거립니다. 어릴 적 첫닭 울음소리가 고고히 새벽하늘을 가르면 아버지의 기침 소리와 함께 온 동내 닭들이 동시에 울어 젖히던 동화 같은 풍경이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합니다.
아파트 창가에서 정원처럼 보이는 밤골 숲은 원래 토종 꿀밤나무와 새들의 낙원이었습니다. 그런 숲이, 요 몇 년 사이에 수백 세대의 아파트 숲이 들어서면서 소리 없이 사라지고 새들의 요란한 울음소리는 듣기 어려워졌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나날이 달라지는 환경은 따지고 보면 자연을 시멘트 속에 가두어 놓는 일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봄날의 햇볕과 바람에는 길짐승과 날짐승과 곤충들까지 새 생명을 잉태하고 약동케 하는 신의 의도가 깃들어 있습니다. 요즘은 봄이 와도 숲의 교향악 단원인 소프라노 꾀꼬리, 그 보다 뒤지지 않는 되지빠구, 영혼이 맑아진다는 산솔새 두견이도 사라져 가는 새들의 대열에 낀 것일까요. 노랫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요. 어느 아마추어 새 전문가에 의하면 이곳 산허리에 등산로를 내고 숲 가꾸기 사업을 하면서 두견이가 부화 기생하는 휘파람새의 서식지가 파괴되었답니다. 밤골 숲에 꿀밤나무는 사라지고 ‘밤골’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습니다. 산에 꿀밤이 열리면 그걸 다람쥐가 먹고, 다람쥐를 오소리가 잡아먹고, 오소리를 너구리 같은 보다 큰 짐승이 잡아먹고, 그런 먹이 사슬의 고리가 제대로 꿰어지자면 맨 아래 사슬인 꿀밤나무의 존재가 숲을 보전하고 생태계를 유지하는 필수 존재라는 것입니다.
지난해 여름, 제주 어느 산간 마을에 있는 리조트에 묵었는데요, 거기 처마에 제비가 둥지를 틀고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아 키우고 있었습니다. 한 쌍의 제비 부부가 작은 입을 벌리고 짹짹거리는 새끼들에게 번갈아 가며 먹이를 주는 모습이 어찌나 정겨운지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고향 마을에서는 제비가 떠난 지 오래입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제비, 잊었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제비의 먹이는 산과 들의 해충입니다. 농약 사용이 늘어나면서 먹이 사슬이 끊기니 조상 대대로 오가든 이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어찌 제비뿐인가요, 논두렁에서 날쌔게 숨어다니면서 먹이 사냥을 하던 숨바꼭질의 명수 뜸부기는요, 1980년 이전에는 흔한 여름 철새였으나, 최근에는 희귀 새가 되었지요. 그 새도 제비처럼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곳을 오가든 철새들이 이 땅이 싫어서가 아니라 살 수 없어서 오지 못하는 슬픔을 누가 알까요? 이들 새들이 살 수 없는 땅에 사람이 살 수 있을까요?
몇 년 전, 어느 날 아침이었죠. 요란하게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귀에 익은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죠. 어릴 적 자주 들을 수 있었던 두견새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가족이 떼지어 온 모양입니다.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동산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 순간 숲은 깊은 적막 속에 빠지고 말았지요. 너무 부끄러워 얼른 발길을 돌렸습니다.
뻐꾸기 무리 중 가장 작은 두견새는 다섯 박자로 경쾌하고 차지게 울어 재낍니다. 마치 쪽박 바꿔주란 소리 같아서 일명 쪽박새라고 불렀습니다. 이 새에 얽힌 전해 내려온 슬픈 이야기가 있지요.
‘옛날 두메산골에서 고약한 시어머니가 매끼 두 사람 분량만큼만 쌀을 쪽박에 주면서 밥을 지으라 했답니다. 시어머니와 남편 밥 푸고 나면 며느리는 먹을 게 없었지요. 결국 착한 며느리는 배고파 굶어 죽었습니다. 그 원혼이 두견새가 되어 ‘쪽박 바꿔줘, 쪽박 바꿔줘’라고 구슬피 운답니다.’
가끔 저문 시간에 순천만 갈대밭에 갑니다. 눈 앞에 펼쳐지는 너른 개펄이 좋고 개펄 냄새를 이리저리 싣고 다니는 바람의 흔적이 좋아서입니다. 키 넘게 훌쩍 자란 갈대숲에 들어서면 서걱이는 갈대의 몸부림 소리가 그렇게 좋습니다. 세계 5대 연안습지이며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진 이곳은 이름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갈대꽃이 피고 철새들이 다시 찾아들기 시작하는 가을이 오면 넘쳐나는 사람들로 갈대밭은 심한 몸살을 앓습니다. 철새들의 낙원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면서 저들이 보금자리가 그만큼 줄어든 것이지요.
이곳 갈대밭 포구에는 수척의 유람선이 사람들을 태우고 운행했습니다. 통통거리는 뱃소리는 사람들에게는 낭만적일지 몰라도 새들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죠. 당연히 시민 단체에서 문제를 제기하자 슬그머니 없애고 지금은 전기 동력선 두 척을 운행하고 있습니다.
무진교를 지나 갈대밭 사이로 꾸불꾸불 산책로를 만들어서 용산전망대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원래 거기는 참게 농게 짱뚱어 등 다양한 바다 생물이 사는 곳입니다. 갈대밭 산책로를 오가다 보면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들이 게를 잡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지요. 엄마와 아기에게는 한 토막의 추억을 남기는 즐거움이 있지만, 이곳 바다 생물들에게는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살아오면서 공짜로 얻은 게 너무 많습니다. 세상만사 공짜는 없다고 배웠는데 알고 보니 내가 얻은 건 모조리 공짜입니다.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결, 나무 냄새, 푸른 하늘, 밤의 찬란한 별빛… 내 생명을 유지하는 데 절대 필요한 이 모든 요소들이 공짜인데 사람들은 고마움을 모릅니다. 갈수록 심해지는 공해로 이런 자연이 주는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만든 재앙의 굴레 때문에 자연이 망가지면 사람 사는 세상은 어떻게 변할지 생각만 해도 섬뜩합니다. 자연의 소리가 아닌 인위적인 소리는 사람들을 귀머거리로 만드나 봅니다. 도시의 시끌벅적한 소음공해는 인간이 귀로 들을 수 있는 자연의 소리를 차단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연의 소리를 상실한 사람들은 청력의 부재, 곧 소통의 부재로 이어집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는 결국 땅에다 씨앗을 심고 거기서 새싹이 터온 데서 시작됩니다. 봄날, 비 온 뒤 아파트의 보도 불럭 사이에서 들풀이 움터 오르듯 시멘트에 감금되어 버린 자연의 소리도 다시 회복될수 있을까요. 이곳 동산에서 살면서 새벽닭 울음소릴 기다리는 까닭은 바로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