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 꽃 피는 마을
오월 한낮 대숲에는 는개가 내리고 있다. 고요하다. 고요는 소리 없음이 아니다. 외려 수런수런 음미하고 내밀한 소리의 세계다. 가는 빗방울이 댓잎을 간질이는 소리가 들리고 댓잎이 댓잎을 서로 부르고 비비고 밀어내는 소리가 들리고, 늙은 대나무가 옹이 진 뿌리를 뒤틀며 부드러운 땅 위로 기어오르는 소리까지 들린다. 나는 그 고요를 자박자박 밟으며 걸어 들어갔다. 내 고향은 징광산 자락 언덕배기 다랑이 논배미에 농사를 짓고 살아온 가난한 마을이다. 그래서 이름도 ‘가는골’이다.
어린 시절 마을에는 기와집이 딱 한 채였다. 대를 이어 내려온 지주 집안으로 담장 안에는 감나무와 밤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어 가을이면 더욱 풍요해 보이던 집이다. 배고픈 아이들이 담장 아래에서 홍시나 알밤이 떨어지길 고대하며 서성일 때 담장은 아득히 높기만 했는데, 인제 보니 내 어깨쯤으로 주저앉았다.
좁다란 골목을 돌고 돌아 기와집 대문으로 들어섰다. 주인이 대처로 나가 살면서 비워둔 지 오래라 안채와 사랑채는 고색이 창연하고 뒤뜰의 천여 평은 족히 되는 대나무 숲만 여전히 울울창창하다. 나는 어릴 적 소꿉친구들과 이 대숲에 몰래 숨어들어 죽순을 따고 다람쥐와 숨바꼭질도 하며 놀았었다. 우리에겐 가장 신비하고 은밀한 놀이터였던 이 대밭은 누구의 대밭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대밭이었다. 그러나 이 집 주인은 우리가 대밭에 드는 것을 몹시도 마땅찮아야 했다. 우린 비 내리는 날이면 일쑤 대숲으로 숨어들었다. 주인에게 들킬 위험이 적기 때문이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흠뻑 젖은 채 대나무 사이를 휘젓고 다니다 보면, 빗방울을 뒤집어쓴 댓잎도 마냥 즐거운 듯 이리저리 몸을 흔들면서 빗물을 쏟아붓곤 했다. 어느 날엔 주인이 느닷없이 나타나 소리를 치는 바람에 달아나다 넘어져서 무릎을 깼다. 엄마는 쑥을 찧어 피범벅이 된 내 무릎에 붙여주면서 연신 내 머리통을 쥐어박으셨다.
이제 지키는 이 아무도 없는 대숲은 적막감이 감돌고 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죽순이 톡-톡-톡 기지개를 켜면서 고개를 내밀었는데, 어떤 일인지 조용하기만 하다. 죽순은 어쩌다 한 촉씩 보인다. 천천히 걷다 보니 저만치 볕이 든 쪽에 댓가지가 무엇을 잔뜩 매달고 무거운 듯 휘어져 있다. 가까이 다가갔다. 줄기마다 수수 이삭 같은 이삭이 돋고 이삭에서 여리디여린 하얀 줄기가 흘러내려 노란 꽃을 조랑조랑 매달고 있다. 대꽃이다. 앗, 이쪽에는 여기저기 댓 꽃이 지천이고 자세히 보니 댓줄기가 이미 푸르름을 잊어가고 있었다.
이 대숲도 생명이 다해가는 것인가. 어린 시절에 딱 한 번 인근 채동 대숲에서 댓 꽃을 보았다. 아버지와 함께 재 너머 산을 오르다가 보게 된 것인데, 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살피시더니, 대나무는 백 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죽는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정말로 대나무가 죽는지 궁금해 몇 번인가 그곳을 다시 가서 살펴보곤 했다. 그해 가을 그 대숲은 하얗게 말라 죽었다.
옛 선비들이 대나무를 세한삼우 중 하나로 여긴 것은 사시사철 푸름을 잊지 않는 그 기상 때문이었다. 대나무는 뿌리를 뻗으면서 대숲을 형성한다. 튼튼히 자란 대나무는 대체로 4~5년이면 베어지는데, 땅속 거대한 뿌리는 평생 자리를 지키며 성대가 베어진 자리에 어김없이 죽순을 밀어 올려 대숲을 유지한다. 그러다 백 년이 되면 그 뿌리에서 올라온 모든 대나무가 꽃을 피우고 그 꽃이 지는 순간 임종을 맞는다. 대나무가 일생에 단 한 번 꽃을 피운다는 것은 기실 드러난 나무가 아니라 그 뿌리의 이야기이다. 땅속의 숨은 뿌리가 모두 죽어버림으로써 대숲 전체가 사라져버리는 그의 죽음은 자못 비장하다. 일생에 단 한 번 꽃 피우고 죽는 그의 삶. 옛사람들은 그것도 닮고 싶었다. 언젠가 죽기 전에 딱 한 번은 꽃을 피우리라는 기대를 확신하고자 했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죽음 앞에 당도해서야 생의 모든 순간이 꽃이었던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대꽃 이삭을 흔들며 다람쥐 두어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이슬처럼 맺힌 빗방울이 구슬처럼 흩어지며 떨어진다. 아서라! 댓 꽃 떨어질라! 대숲을 나서는 발길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귀한 꽃인데, 댓 꽃이 피면 나라에 좋은 일이 생긴다는 전설도 있다는데…. 촘촘히 들어서서 허리 한번 구부리지 않고 꼿꼿하게 걸어온 대나무들은 대꽃이 피는 여기 이 마을까지 오는 데 백 년이 걸렸다.
중생이 육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집착과 미련 때문이라고 한다. 육도를 벗어나면 열반이다. 꽃을 피운 대나무는 집착이나 미련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일시에 모두가 사라져버린다. 백 년을 걸어 대나무가 도달한 곳은 피안의 마을이다. 인간도 백 년을 걸어 죽음에 이른다. 아마도 옛사람들은 그 죽음이 피안의 마을, 열반의 마을이기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대나무와 인간이 예부터 깊은 우정을 나누어 온 것이 새삼스레 심상치 않아 보인다.
마을 골목길로 내려왔다. 오월의 향기와 바람결은 아직 여전한데 반세기가 흘러 가버린 지금, 적막에 휩싸인 마을은 유령 마을 같다. 한때 60여 호가 넘어 활기차던 마을은 이제 20여 호만 남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아주 오래전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사라진 마을에는 집마다 노인들뿐 젊은 사람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마을 이장이 예순을 넘었는데 그가 제일 젊은이다. 이대로 가면 10년 안에 마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어릴 적 동갑내기 친구가 여섯 명 있었다. 재섭이, 성식이, 동섭이, 천식이, 용규, 만석이 모두 철없는 장난꾸러기들, 죽어서도 함께 모여 살고 싶은 정겨운 이름들이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남의 집 담장을 넘기도 하고, 봄이 오면 들로 산으로 몰려다니며 송피를 벗겨 먹고 띠 순을 뽑아 먹었다. 이들 죽마고우 중 셋은 이미 죽고, 둘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부산에서 살고 있고, 유일하게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용규는 지난해 암으로 투병하다 그만 불귀객이 되고 말았다.
용규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흔을 훌쩍 넘긴 용규 어머니와 용규의 아내가 살고 있다. 용규 어머니는 동네에선 백동할머니라 불렀다. 내 어머니 보다 무려 30여 년을 더 오래 사신 분이지만, 허리가 굽은 것 말고는 아직 잔병치레 없이 정정하시다.
“워매, 이거 누구다냐. 어서온나”
백동할머니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글썽인다. 메마르고 까칠한 손길이지만 따듯한 할머니의 체취가 물씬 가슴속으로 밀려든다. 마치 내 어머니를 뵙는 것 같아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만석이 집에도 들러봤다. 사람의 흔적이 오래전에 사라진 빈집은 개망초가 내 키만큼 자라 집안을 온통 점령하고 있다. 낡아 떨어진 문짝, 개망초 속에 묻혀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장독, 허물어져 내리 는 흙벽….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롭다. 우리들의 공부방이었던 뒷골방은 쥐똥과 먼지로 가득하다. 누렇게 색이 바랜 벽지엔 낙서가 그대로 남아있다. 눈 내리던 밤, 호롱불 아래서 동화책을 읽으며 꿈을 꾸던 소년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수호신처럼 마을을 감싸온 대나무 숲은 머지않아 사라질지도 모른다. 대나무가 모두 말라 죽으면 그 자리에서 작은 죽순이 올라오는데 그 어린 대도 모습을 갖추기 전에 다시 꽃이 피고 죽기를 두 번, 세 번 거듭하고서야 비로소 새로운 대나무가 자라기 시작한다고 한다. 내 고향도 쇠락의 길 끝자락까지 다다르면 다시 회생할 수 있을까.
옛집으로 들어섰다. 가끔 들러 잡초를 뽑고 청소하지만, 사람이 살지 않은 집이라 세월에 바래고, 비바람에 씻겨 퇴락해 간다. 그래도 뒤란, 울타리 대나무에 바람이 일고 댓잎이 일렁인 것을 보니 날 반기는 것 같다. 어느새 날이 개어 햇볕이 내리쬔다. 저 따사로운 햇살…. 어머니의 품에 든 듯 안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