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구나무
고향마을 앞에는 수백 년 묵은 마을의 수호신 둥구나무가 있다. 나는 이 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수백 년 누적된 연륜이 자아내는 경외감과 ‘너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나?’라며 부드럽게 꾸짖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반세기 동안 고향을 등지고 살다가 고향을 찾아 이 고목을 바라보면 공연히 눈물이 난다.
둥구나무는 동네 앞의 허전함을 비보를 위한 풍수 목적으로 심어진 것이지만, 나무의 용도는 다목적이다. 동네 사람들에게 꿋꿋한 삶의 의지를 고양 해 줄 뿐 아니라, 정서를 함양해 주기도 하고 정월 대보름이면 돼지머리를 얹은 푸짐한 상을 차리고 풍악을 울리며 마을의 안녕과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동네 사람들은 둥구나무에 녹음이 짙어지면 여름 철새들이 깃들어 노래하는 걸 바라보며 보릿고개의 시름을 참아냈고, 여름 소나기를 피해 나무 아래 서서 무성한 이파리에 떨어지는 빗소리의 청량감에 고달픈 삼복더위를 잊었다.
둥구나무에는 오월 단오에 그네를 뛰고 처녀들이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울긋불긋 그네를 뛰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기쁨에 동네 총각들은 그넷줄을 드렸고, 처녀들이 춘향이처럼 창공을 차오르는 것은 그 총각들의 눈길 때문이었다. 둥구나무 아래는 동네 젊은이들에게 꿈과 낭만의 장소였다.
뒷산에 봄이면 진달래가 곱게 피고, 가을이면 갈색 억새와 들국화 물결이 출렁거리고, 겨울이면 산새가 눈보라를 피해 대나무 숲으로 푸덕푸덕 날아드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사람들은 가난해도 서로 화목했고 인심은 넉넉했다. 여름철이면 으레 마을 어른들이 당산에 모여 한담을 하거나 장기를 두면서 소일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동네에 초상이 나면 노제를 지내는 곳이 바로 둥구나무 아래였다. 부모님, 형 모두 이곳을 거쳐 먼 길 떠나셨다. 그러니 둥구나무는 마을의 길흉사를 모두 알고 있다. 모른 척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둥구나무는 어릴 적 추억을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무에서 고향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 나무 밑에서 코 흘리며 뒹굴던 정겨운 소꿉동무 얼굴들이 시간이 정지된 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우수 경칩이 오면 서기가 감돌았다. 개구리가 긴 잠에서 깨어나고 성급한 식물들은 잎과 꽃을 내민다. 논둑길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보리밭 고랑에 훈풍이 일렁거리고 들판에 붉은 낙조가 내려앉으면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애들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골목길을 따라 울려 퍼졌다.
골목을 지나 옛집으로 들어섰다. 글음에 그을린 집은 마치 다 노모의 가슴팍처럼 빈약하기 그지없다. 안방에 시간이 멈춘 벽시계를 가만히 바라보니 잃어버린 시간이 슬금슬금 기어 나온다. 그 사라진 시간의 그을음이 방안에 가득 차 있다. 금방이라도 재깍재깍 분침이 돌아가며 시간을 알려 줄 것 같은 모습이다. ‘당신들은 나를 잊어버렸어도 나는 당신들을 잊어 본 적이 없어’ 하는 듯 섭섭한 기색이 역력해서 마음 둘 바를 몰랐다.
이 집에서 대대로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았던 유순한 사람들, 그들의 생명은 대를 이어 오늘 나에게까지 닿아 있다. 나는 유일하게 남은 이 터전의 흔적이다. 아버지와 엄마와 큰엄마, 하나밖에 없는 형, 그리고 작은누나와 매형, 떠나간 모든 이들이 이 터전을 거쳐 갔다. 그들이 일시에 내 안에서 웅성거린다. 그분들 곁으로 내가 떠나면 이 집은 자연 본연의 모습으로 갈 것이다.
내가 태어나든 해, 아버지가 엄지손가락만 한 팽나무 묘목을 우물가 심었다. 지금은 세월의 무게를 짊어져 내 몸통보다 더 굵어졌다. 나무를 가만히 껴안았다. 촉감은 까칠해도 아버지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지붕이고 벽이고 기둥이고 삭아 허물어질 듯 남루하다. 장독대 옆 감나무에 빨갛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고 떨어진 홍시가 여기저기 떨어져 바람에 뒹군다. 돌보는 이 없어도 감나무는 저 혼자 철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 맺고 그 열매를 익혀 땅에 돌려주고 있었다. 장독대에는 항아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른 새벽 정화수를 장독대에 올려놓고 치성을 드리던 엄마 모습이 아른거린다.
마당에는 메마른 낙엽들이 소복이 쌓여 뒹굴고 있다. 허무가 뼛속 깊이 스며든다. 외양간도 여물통도 번질번질 닳아버린 쇠말뚝도 옛 모습 그대로지만, 소도 없고 여물 줄 사람도 없다. 주인 잃은 물건들이 켜켜이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서 쓰고 있다.
동구나무는 마을의 구심력이었다. 변변치 못한 토지를 경작하며 삶을 포기하지 않고 면면이 이어온 동네의 상징이고, 동네 사람들 소망의 고삐를 매고 살아온 서낭나무이기도 하다. 나무 아래 섰다. 시원한 바람이 옷깃을 스친다. 둥구나무는 나더러 객지에서 바둥거리며 살지 말고 그만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니 너라도 쓰러져 가는 마을을 지키라고 당부하는 것 같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다. 고추잠자리가 날고 새들이 지저귀고 노래 부르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다. 이토록 푸르고 싱그러운 고향, 사랑이 듬뿍 담겨 있는 고향 마을이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