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

박꽃

안규수 2021. 10. 11. 18:26

 

   아침 6, 오월의 푸른 신록 사이로 활기가 넘칩니다. 향긋한 풀냄새와 재잘거리는 새소리의 마중을 받으며 산을 오릅니다. 산책로에는 노르스름한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온 산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산행 후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안방에 있는 아내가 생각나네요. 아내는 밤꽃 알레르기가 극심해 방안에서 창문을 걸어 잠그고 꼼작도 안 하고 있습니다. 물론 밤밭을 다녀온 저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덧없는 세월의 흔적이 아내 얼굴에 주름살로 남아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나이라는 요술에 가슴 깊숙이 살아 숨 쉬는 뭔가를 잊고 살아온 느낌이 듭니다. 그것은 가장 뜨겁고 찬란한 청춘인지도 모릅니다.

  신혼 초, 젊은 아내를 두고 베트남전쟁 불 속으로 뛰어든 철없는 남편, 그런 남편을 두고 애간장 태웠을 아내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옵니다. 이역만리의 거리를 두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심하던 시절이 회청색 안개 속에 아련한 빛으로 어려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 보니 꿀을 먹는 시간이 아니라 꿀을 기다리는 시간이 가장 달콤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내가 40대 중반 무렵, 한창 젊은 나이에 제법 멋을 부리고 살 때였습니다. 정기검진 때 암이 의심되니 빨리 큰 병원에 가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대학병원에서 암 확진을 받았습니다. 예약 환자가 밀려 수술 날짜를 두 달 후로 잡고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일은 맑게 갠 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아이들도 그런 엄마를 보고 울고불고 집안이 하루아침에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리 수술이 다급한 아내를 두고, 두 달을 기다려야 하는 나 역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다음 주 월요일 아침에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수술 날짜가 잡혔으니 오늘 입원하라는 기적 같은 소식입니다. 너무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허둥댔지만, 행여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아내가 수술하는 날 아침은 하늘이 잔뜩 흐려있었습니다. 오전 9시경 흰 가운을 입은 건장한 체구의 두 남자가 이동 침대를 밀고 병실로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내 눈에는 마치 저승사자가 아내를 데리러 온 것 같이 보였습니다. 어찌나 놀랐던지 소름이 확 끼치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때는 암에 걸리면 거의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내를 수술실에 들여보내 놓고 복도 의자에 앉아 있으니 가슴이 막힐 것 같은 초조함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평소 좀 더 잘해 주지 못한 것이 한없이 후회되고 안타까웠습니다. 사람이 죽는 일은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 일이 잘못돼 저토록 젊은 나이의 아내가, 절대 그럴 수 없고, 반드시 살려내겠다고 수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수술하는 아내를 두고 병원을 빠져나와 무작정 무등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 중턱쯤 차를 세우고 숲속으로 들어가 소나무를 붙잡고 울부짖었습니다.

  “주여! 은혜를 벳푸시옵소서. 주님이 수술을 집도하여 주소서. 살려주십시오! 아내 데려가시면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저를 데려가십시오.”

  눈물 콧물 흘리면서 하나님께 떼를 쓰듯 간절한 마음으로 매달렸습니다. 그러길 두어 시간이 흘렀을까요. 잔뜩 흐린 날씨가 어느새 맑아지면서 고운 햇살이 내려 앉습니다. 수술이 끝날 시간이 다 된 것 같아 다급히 병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가 흰 가운에 덮인 채 의식이 몽롱한 야윈 얼굴로 이동 침대에 실려 나옵니다. 심장만 뛸 뿐, 축 늘어진 육체에 호흡이 없는 듯 보입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본 순간 비로소 아내가 나에게 어떤 사람인지, 아내 사랑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나에 대한 반성이 날카롭게 파고들었습니다. 실로 말로만 발라온 인생이요, 남편일 뿐입니다.

  아내는 창백한 얼굴로 나를 바라봅니다. 차디찬 손으로 내 손을 꼭 잡더니 애들을 찾습니다. 아내의 양 볼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1년여 항암치료 과정은 힘든 고통이었지만 아내는 잘 참아 주었고 기적적으로 일어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내 곁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성격과 자란 환경이 다른 부부의 삶은 오랜 세월 살아오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서로를 닮아 가는가 봅니다. 젊어서는 모난 돌이 서로 부딪치면서 꽹과리 소리가 났지만, 이제는 장식장에 놓인 수석처럼 제자리에 다소곳이 놓여 정이 갑니다. 모자람과 채워줌, 직선과 곡선의 조화,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는 것이 부부의 지혜가 아닐까 싶습니다. 몇 년 전부터 각방을 쓰던 아내가 웬일인지 베개를 들고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무거운 다리를 내 다리에 얹고 잠을 잡니다. “왜 왔어?”하고 물었더니 당신 자다가 갑자기 죽으면 어째? 내가 곁에서 지켜줘야지.” 하고 능청을 떱니다.

 

   흰 옷자락 아슴아슴 /사라지는 저녁답

   썩은 초가지붕에 /하얗게 일어서

   가난한 살림살이 /자근자근 속삭이며

   박꽃 아가씨야 /박꽃 아가씨야

   짧은 저녁답을 /말없이 울자 <목월의 박꽃청록집>

  아내의 모습을 화사한 꽃이 아닌 소박한 박꽃으로 표현한 목월의 아내 사랑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내 아내도 무던히 박꽃을 닮았습니다. 짧은 저녁을 말없이 울자라는 마지막 시구가 가슴에 박힙니다. 본디 내민 데가 없어 수더분한 것도 그렇고, 희끗희끗한 머리가 어릴 적 초가지붕 위에 수줍게 핀 박꽃을 닮았습니다. 마당 가 담장에서 갓 피어난 노란 호박꽃이 태양을 바라보고 방긋 웃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