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은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름을 아시나요?
오늘도 새 날, 새 호흡, 새 힘, 새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자신을 음식에 비유하셨다.
요한복음 6장에서 “나는 생명의 떡”(I am the bread of life), “내 살은 참된 양식”(my flesh is real food)”이라고 말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요 6:3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 요 6:55-57
그분은 인간에게 상처로 얼룩진 만성 공허감, 어떤 음식으로도 채울 수 없는 끝없는 갈망이 있음을 아셨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나로 채움을 받아라.
다른 중독에 의존하지 말고, 내게 위로를 받으렴.”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는 대체 불가다.
우리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으로 채워질 때 그분이 내 몸의 일부가 되신다.
내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고 나는 그분을 닮아가게 된다.
그것이 진짜 사랑을 깨닫는 과정이다.
완벽한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사랑받음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다.
육신의 부모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부모와 못 누렸던 깊은 애착 관계를 경험하면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게 사랑이 아니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당신은 생명의 양식을 얼마나 섭취하고 있는가?
완전한 사랑이신 그분으로 날마다 채워지고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친밀한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
그런데 많은 현대인이 너무 바빠서 예수님 말씀을 들을 시간이 없다고 한다.
염려하고 근심하느라 생명의 양식이 눈에 안 들어온다.
불안해서, 도태될까 봐, 인정받지 못할까 봐 속도를 늦추지 못한다.
분주한 마음은 자율신경계를 자극하여 신경과 근육을 극도로 긴장시키고 호흡을 가쁘게 한다.
또한 모든 신체 감각을 각성시키는 과각성(hyperarousal)에 이르게 하고 불안, 불면, 공황장애 등을 일으킨다.
성경 속 대표적인 일 중독자로 마르다를 들 수 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눅 10:40).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누구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아서 이러고 있나?
내가 안 하면 누가 밥을 하고, 집을 치우고, 손님을 안내하고, 또….’
그러다 참다못해 말한다.
“예수님, 마리아도 일하라고 하세요.”
예수님이 뭐라고 답변하셨는가?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2).
마리아가 스스로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마르다를 향한 위로도 잊지 않으신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눅 10:41,42).
당신은 무얼 선택할 것인가?
중요한 걸 놓치면서 분주한 마르다처럼 살지,
마리아처럼 모든 걸 내려놓고 예수님 발아래 앉을지.
접대를 잘하고 싶은 마음도 귀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일을 벌이며 남들에게 칭찬받으려 하진 않는가.
음식 준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우선순위가 바뀌면 안 된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하다.
내 힘으로 모든 걸 해내려고 자신을 혹사하면서까지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인정욕구’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늘 피곤할 수밖에 없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일하느라, 교회에 가느라, 사역이 많아서 피곤하다고 입술에 불평이 가득하고 미간은 잔뜩 구겨져 있다.
이런 말을 습관처럼 하고 산다면 삶의 속도를 늦추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마주할 여유조차 확보하지 않으면서 늘 기도 응답이 없다고만 한다.
난 그에게 말한다.
“당신이 선택한 결과예요.
상처받고 불평하면서 남을 탓하지 마세요.”
게리 토마스는 《내 몸 사용 안내서》에서
“몸과 영혼을 함께 돌보려면 방해물 두 가지를 제거하라. 바로 탐욕과 나태다”라고 했다.
인정욕구(탐욕)와 게으름(나태)을 제거하라는 뜻이다.
나태한 사람은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하겠지’라는 생각을 경계하고,
평소 욕심을 부려 120% 일하는 사람은 80%만 해보길 권한다.
이렇게 말하면 내담자들은 “어떻게 그래요? 원장님은 그렇게 하세요?”라고 되묻는다.
요점은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을 인정하는 데 있다.
수치상 딱 80%만 하라는 게 아니라 더 하고 싶어도, 아니면 하기 싫어도 어느 선에서 타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의 공통점은 양극단에 있다.
중독의 문제, ‘모두 내 탓’을 하거나 ‘모두 남 탓’을 하는 경우,
너무 감정적이거나 너무 이성적(지식적)인 경우 등 매사에 모 아니면 도로 극을 달린다면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문제의 원인은 생각보다 간단하고 치유도 참 쉽다.
궁극적인 치유자이신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달을 때 누구나 변할 수 있다.
– 내 마음도 쉴 곳이 필요해요, 유은정 / 규장
† 말씀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 시편 62장 5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 잠언 8장 17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11장 28~30
† 기도
저의 삶의 공허함을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로 가득 채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생명의 양식으로 채워지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독일의 존경받는 목회자 프레드릭 오버린 목사님이 시골 여행 중이었습니다.
외딴 길가를 걷다 심한 눈보라를 만나 길을 잃은 목사님은 어딘지도 모르는 벌판에서 얼어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마차가 목사님을 발견하고는 멈춰 돕기 시작했습니다.
마부는 목사님을 위해 급히 불을 피우고 따뜻한 차와 음식을 마련했고
그치지 않는 거센 눈보라를 뚫고 가까운 마을의 숙소까지 데려다 줬습니다.
마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목사님은 감사를 표하며 마부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마부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마차를 끌고 사라지며 오히려 질문을 던졌습니다.
“목사님은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름을 아시나요?
그 사람의 이름을 알려주신다면 저도 제 이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은 “오른손이 하는 선행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뜻이 무엇인지를
그 마부를 만난 뒤에야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다”라고 훗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진정한 선행에는 나의 의가 드러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 하나님이 명하신 방법대로 진실된 선행을 실천하십시오. 아멘!
주님! 주님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말씀처럼 조용히 도웁시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