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싶은 수필

겨울 산은 자지 않는다/ 장돈식

안규수 2014. 6. 12. 08:17


 

 어제는 눈이 내렸다. 지난 겨울은 눈이 많았었다. 이 산의 8부 능선 위의 눈은 4월이 지나야 녹는다. 오늘도 산으로 든다. 옛사람들은 "산에 오른다"는 말보다는 "산에 든다"고 했다. 서구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산은 정복의 대상이다. 그러나 우리네 누군가가 그런 표현을 한다면 마치 할아버지의 등을 기어오르는 철부지 손자에 비교하게 된다.

혼자만 겨울산을 즐기기가 미안하여 더러 벗들을 내 산방으로 부른다. "딸이 고3이라서", "가게를 비울 수가 없어서" 등의 대답이 돌아온다. "어머니의 품을 찾노라 하루 문을 닫습니다" 가게 문에 써 붙이고 훌쩍 떠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나마 이따금 와서 한참 동안 숲 속을 산책하고 방금 돌아온 친구에게 무엇을 발견했느냐고 물어보았다. 특별한 게 없었다고 대답한다.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헬렌 켈러가 쓴 글의 한 대목을 떠올린다.

'나는 잎사귀 하나에서도 정교한 대칭미(對稱美)를 느낀다. 손으로 은빛 자작나무의 부드러운 표피를 사랑스러운 듯 어루만지기도 하고, 소나무의 거칠고 울퉁불퉁한 껍질을 쓰다듬기도 한다. 봄이 되면 새싹과 새 눈을 찾아보려는 희망으로 나무줄기를 더듬어본다. 매우 운이 좋은 경우 나뭇가지에 살며시 손을 대었을 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새들의 행복한 떨림을 느낄 수가 있다.'

그렇다고 무얼 느껴보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어린애가 어머니의 젖가슴을 더듬는 것은 모성애 따위를 의식해서 하는 짓이 아닌 것처럼, 그저 좋아서 산을 찾을 뿐이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산야가 푸를 때는 오히려 때 묻은 옷을 걸친 것처럼 보이더니 온 산이 시들고 조락(凋落)하는 이 겨울에야 송백(松栢)의 참모습을 나타낸다. 푸새로는 눈 덮인 산에서 청순한 초록을 뽐내는 범고사리가 있다. 검은 바위를 등지고 흰눈을 깔고 앉은 이 풀은 정말 아름답다. 또 있다. 눈 속에 한껏 푸른 산죽(山竹)을 꼽아야 한다. 키는 난장이지만 또렷한 잎 매무새와 진한 초록은 은세계(銀世界)의 백미(白眉)다.

그들 군락(群落) 앞에 다가가 눈 위에 무릎을 꿇고 감상하며 저들이 뿜는 산소를 들이마신다. 내 허파는 금세 혈당(血糖)에다 불을 댕겨 체온을 만든다. 고작 천 미터의 이 산길을 허덕이던 내 몸은 날을 듯 가벼워진다. 나의 입김이 저들의 잎새에도 닿았으리라. 내 것이 저들 속에, 저들 것이 내 안에, 이제 너와 내가 따로 없다. 우리는 하나가 된다. 잔잔한 감동이 가슴에 인다.

사람도 저마다 행색이 다른 것처럼 산의 나무도 서로 다르다. 나무 중에 귀공자는 피나무다. 희뿌연 피부에 후리한 키, 장부다운 기상이 철철 넘친다. 우아한 참박달이 나무 중의 신사라면, 물푸레나무는 블루칼라다. 벌어진 어깨에 질긴 목질(木質)이 그렇다. 이들 나무 사이의 층층나무는 이름처럼 층층의 촛대를 받쳐 든 사제(司祭)처럼 보인다. 이제 봄이다. 봄에 틔울, 새 눈[芽]이 안쓰러워 묵은 잎을 떨구지 못하고 안달하는 떡갈나무, 물참나무, 단풍나무는 늦도록 자식을 과보호하는 우리네 어버이들을 너무 닮았다.

눈 위에는 발자국이 무수하다. 자국만으로 그 발의 임자가 누구인지를 다 알기는 어렵다. 송송한 자국은 들쥐가 아닐까. 뒤밟아서 가보면 조그마한 구멍으로 이어져 있다. 그 중 산토끼의 자취는 분명하다. 후경골(後脛骨)의 긴 자국으로 안다. 개 발자국 같은 것은 여우나 너구리일 것이고, 쪽발자국은 노루 아니면 고라니다. 좀 큰 자국은 멧돼지일 게다. 눈을 좋아하는 것은 집에서 기르는 개뿐이 아닌가 보다. 길짐승, 날짐승들이 눈 위를 어지러이 쏘다닌 자국들이 낭자하다. 요즘 밝은 달빛 아래서 야행성인 이들의 군무(群舞)는 자못 환상적이리라.

외로이 걷는 산길에서 "푸드득" 힘없이 날아올라 얕은 나뭇가지에 웅크리고 앉는 새가 있다. 발 밑에서 화들짝 날아 사람 놀라게 하는 꿩이 아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산비둘기였다. 이 깊은 눈 속에서 무얼 쪼아 먹을 수 있었으랴. 배가 고픈가 보다. 다음번에는 먹이를 좀 가져다 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내려오는 길에도 언제나처럼 많은 종류의 새들을 보았다. 박새 한 무리가 붉나무의 수수이삭 같은 알찬 열매에 매달려 열심히 뜯어먹고 있었다. 산까치는 들장미의 열매를, 뱁새와 딱새는 며느리밑씻개의 씨앗을 쫀다. 조물주는 산에 있는 나무나 풀에게 새들의 먹이를 끊임없이 주라고 명령했을 것이고, 새들에게는 그 열매를 먹은 대가로 이들 식물의 씨앗을 널리 퍼뜨리라는 임무를 주었을 것이다. 이 겨울에도 저들은 그 조물주의 분부를 차질 없이 수행하고 있었다.

이끼 덮인 늙은 바위를 어루만져 본다. 그 바위 앞에 서면 나는 어린아이다. 80대면 늙었다는 사람들의 개념은 설득력이 없다. 지금은 고인이지만 山에 살며 가끔 글도 쓰던 이곳 토박이 C씨는 그의 농장 입구에 크고 잘 생긴 돌을 세우고, 그 뒷면에다 자작의 시를 한 수 새겨 넣었다.

'청산(靑山)아 물어보자 네 나이가 몇이더뇨 / 유수(流水)야 물어보자 언제까지 흐를런고 / 동명(東明)이 어제요, 단군이 그제거늘 / 사람의 셈으로는 말 못한다 하더라.'

이 시가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산이 좋아 사십 년을 여기서만 살아온 그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시이리라.

산은 영원하다. 협곡을 흐르는 시냇물의 중얼거림은 산의 맥박이고, 나무가 서로 비비고 바람과 속삭이며 내는 소리는 산의 숨결이다. 겨울이 깊어도 그 언어와 그 호흡은 쉬지 않는다. 산은 그가 품은 가족들을 포근하게 백설로 덮어 추위를 가려준다. 새 봄맞이 준비로 어머니인 산은 쉴 새가 없다. 산은 억겁의 세월을 살았으되 젊고, 항상 바쁘다. 겨울산은 자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