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편지

상처는 사랑으로 퉁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안규수 2023. 3. 21. 07:49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오늘도 새 날, 새 호흡, 새 힘, 새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멋진 하루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내 인생과 타인의 인생을 망치겠다고 작정하고 태어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 한들, 
그가 그 환경에서 다른 모습으로 자라는 게 쉬운 일이었을까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의 환경과 가진 모든 자원 속에서 잘해보려고 나름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망치려고 의도한 게 아닙니다.

다만 조금 더 자신의 마음과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었더라면 
더 잘 사랑하고 더 적게 상처 줄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어려웠을 뿐입니다. 
또 노력은 했지만 잘 몰라서 잘하지 못했을 뿐이지요.

서로가 서로에게 줬던 사랑뿐 아니라 상처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게 좋아요. 
상처는 사랑으로 퉁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돈은 5천 원 빚을 지고 1만 원으로 갚으면 5천 원 빚이 사라지지만 상처는 그렇지 않아요. 
그럼에도 상처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헤아려 보듬어줘야 해요. 
그것이 건강한 마음입니다. 
내가 상처를 준 쪽이어도 마찬가지예요.

‘그래, 나는 그때의 나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그때의 너는 속상할 수 있었겠구나.’

어린 시절의 저는 그렇지 못했어요. 
제 마음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았어요. 
서운한 마음이 들면 그 마음을 무시하고 나쁘게 여겼지요.

‘엄마가 저렇게 힘드신데 나라도 힘들게 하지 말아야지. 
속상한 일도 속상해하면 안 돼. 
나 정도면 얼마나 행복한 건데. 
언니와 여동생은 나보다 훨씬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어. 
내가 힘들다고 하는 건 투정이야. 
나는 감사만 해야 해.’

상대가 더 힘들다고 내 고통은 무시해도 되는 게 아닌데 어린 저는 그랬어요. 
물론 지금의 저는 그렇지 않아요. 
유치원생 아들을 키우는 엄마가 된 오늘의 제가 그때/거기의/저를 봅니다.

아들의 나이에 어리광을 잘 부리지 못했던 어린 저를 진심으로 안쓰럽게 생각하지요. 
그렇다고 어린 날의 저만큼 부모님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님을 두었기에 
내가 같이 희생해야 했던 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들을 이상화하지 않을 뿐이지요.

그들의 딸로서 같이 희생해야 했던 어린 제 마음을 충분히 알아줌과 동시에, 
많은 짐을 지고 하루하루 견뎌야 했던 그때의 부모님(지금의 저보다 어렸던)을 생각하며 이전보다 더 존경합니다.

제가 부모님이 처했던 환경에서 그들의 자원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나 자랐다면 어땠을까요? 
그만큼 살아오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부모님이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살았는지 이전의 저보다 더욱 잘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에게 약함이 있으면 있는 대로, 서운한 부분이 있으면 있는 대로 
그들이 살아온 인생 그대로를 인정하고 긍정하며 이전보다 더욱 존경합니다.

저와 가족의 이야기를 쓰면서 저 역시 소화되지 않은 상처는 아직도 다 내어놓지 못했어요. 
하지만 제 글을 읽으며 
누군가는 다친 마음이나마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헤아리는 두려운 도전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음 헤아리기 연습을 많이 한 후에 
나를 아프게 한 상대의 마음까지도 헤아리는 연습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히 상처 준 그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현재의 내가 “그때/거기의/나”와 “그때/거기의/그”를 헤아리는 시도를 해보라는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상처받은 내 마음이 조금 더 위로받고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저도 상처는 상처대로 인정하고 은혜는 은혜대로 감사하려고 합니다. 
부모님의 삶을 진심으로 존경하지만 그 삶의 그림자도 이해합니다. 
그 상처가 하나님의 은혜를 매 순간 체험하는 은혜의 요소가 된 것도 사실이니까요.

전에는 은혜가 너무 커서 어려움을 어렵다고 말하는 게 하나님 앞에 염치없게만 느껴졌어요. 
그래서 ‘나는 상처가 없다’라고 합리화를 했었지요. 
하지만 상처는 상처고 은혜는 은혜입니다. 
저는 상처도 그 자체로 은혜로 여깁니다. 
다만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가 크니 상처는 없다’라고 여기지는 않게 되었어요.

삶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고 합니다. 
오직 모든 순간에 제 삶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내 딸, 애썼다, 한혜성

† 말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 이사야 30장 26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이사야 53장 5절

† 기도
하나님. 제 안에 상처들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서운한 마음들도 있고, 어떤 일에 저 자신을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그 상처들을 상처대로 인정하겠습니다. 
그 상처를 통해 주님이 주시는 은혜들도 감사함으로 받겠습니다. 
주님의 넓은 은혜로 헤아려 보듬어주시고, 저 또한 주변 사람들을 사랑과 은혜로 헤아려 보듬게 하소서.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전 2:16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미국의 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호는 비밀 임무를 수행한 후 태평양을 건너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극비리에 수행된 임무였기에 미국에서도 인디애나폴리스호의 동선을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첩보를 입수한 일본의 잠수함이 습격해 어뢰를 쐈고 무방비에 있던 인디애나폴리스호는 단박에 침몰됐습니다.
300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고 남은 900명의 병사들은 배의 잔해들을 붙잡고 구조를 기다렸습니다.
함장인 찰스(Charles B. McVay III)는 병사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찾았지만 
워낙 극비리에 진행된 작전이라 사고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고 골든타임이 한참 지난, 사고 4일 뒤에야 구조대가 도착했습니다.
4일 동안 추위와 외로움, 그리고 상어떼의 공격으로 600명이 죽었습니다.
생존자 중 한 명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사투를 벌이던 처참했던 그 순간 무신론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기도했습니다.”
죽음 앞의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결코 죽음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유일한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친 세파 속에서도 끝까지 붙잡으십시오. 아멘! 
<김장환, 나침반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