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편지
내 삶을 여기에 걸어야겠다
안규수
2023. 5. 10. 08:48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오늘도 새 날, 새 호흡, 새 힘, 새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오늘 하루 저를 통해 누구를 사랑해 주길 원하십니까?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멋진 하루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고등학교 2학년 때 동생의 권유로 ‘경배와 찬양’ 수련회에 참석했다.
동생은 언니의 방황과 슬픔을 종식할 유일한 방법이 자신이 앞서 경험한
동생은 언니의 방황과 슬픔을 종식할 유일한 방법이 자신이 앞서 경험한
영적 평안을 누리는 것뿐이라는 생각에 꽤 오랫동안 나를 이 수련회에 데려가기 위해 준비했었다.
당시 나는 거부할 수 없는 동생의 간곡한 권유에 떠밀려 아무런 기대도 없이 참석을 결정했다.
당시 나는 거부할 수 없는 동생의 간곡한 권유에 떠밀려 아무런 기대도 없이 참석을 결정했다.
출발 당일, 수련회장으로 향하는 긴 이동 시간 동안 내내
나는 충만한 헌신자들 사이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대중 가수의 음악을 들었다.
이어폰을 끼고 창밖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주변 사람들에게 완전히 무신경했다.
이어폰을 끼고 창밖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주변 사람들에게 완전히 무신경했다.
버스에서 내려 숙소에 짐을 풀고 첫 예배를 드리러 예배당으로 향할 때까지도 나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흥얼거리며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예배당으로 가는 완만한 언덕을 오르는데 누군가 내 등짝을 세차게 내리쳤다.
“그만 좀 해라!”
동생이었다.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는 듯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나는 태연히 받아쳤다.
“예배당에 들어가면 어차피 못 들으니까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들을 거야.”
결국 나는 동생의 호통과 신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만 좀 해라!”
동생이었다.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는 듯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나는 태연히 받아쳤다.
“예배당에 들어가면 어차피 못 들으니까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들을 거야.”
결국 나는 동생의 호통과 신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련회 장소에서도 대중 가수 듀스의 음악을 흥얼거리며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어차피 들을 수 없으니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듣겠다던 내 말은 적중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다른 노래를 찾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다른 노래를 찾지 않았다.
그게 끝이었다.
그리고… 시작이었다. 완전히 다른 삶의 시작.
예배당으로 향하던 그 언덕길의 걸음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그리고… 시작이었다. 완전히 다른 삶의 시작.
예배당으로 향하던 그 언덕길의 걸음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그날을 기점으로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인생에 한 번쯤 찾아올까 말까 한 운명적 만남과 경험을.
나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그분은 약속대로 당신의 백성의 찬송 가운데 계셨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는 지금 “나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라는 이 한 줄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나는 지금 “나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라는 이 한 줄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 한 줄이 어떻게 읽히고 해석될지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유한하고 미약한 우리 존재가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서 그분의 얼굴을 마주하는 경험 말이다.
이것이 어떻게 표현되고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이것이 어떻게 표현되고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한 줄의 글을 적어 내려가길 망설이면서
문득 나는 바로 이 행위가 이 경험을 가장 잘 표현해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이 그분의 임재라는 것!’
우리의 존재가 어떤 초월적 힘과 사건에 직면할 때 종종 ‘억’ 하는 소리를 낼 때가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이 그분의 임재라는 것!’
우리의 존재가 어떤 초월적 힘과 사건에 직면할 때 종종 ‘억’ 하는 소리를 낼 때가 있다.
이런 경험을 ‘말문이 막힌다’라고 표현한다.
이성과 경험을 초월하는 압도적인 존재 앞에서 사고 회로가 잠시 큰 혼란을 겪는 것.
미처 사유와 언어로 주워 담을 수 없는 경험.
미처 사유와 언어로 주워 담을 수 없는 경험.
따라서 침묵과 경배가 그분의 임재 앞에 선 인간의 영적 본능이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본능적으로 멈췄다.
그분의 영광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숨을 쉬는 듯했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본능적으로 멈췄다.
그분의 영광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숨을 쉬는 듯했다.
완전히 새로운 호흡이 불어넣어졌다.
영혼에 생명의 들숨이 채워졌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막 나온 갓난아이처럼 새로운 숨을 내쉬며 깨달았다.
‘아, 이것이 진짜 삶이구나….’
이전에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던 하나님의 존재가 너무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실체로 내 앞에 계셨다.
‘아, 이것이 진짜 삶이구나….’
이전에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던 하나님의 존재가 너무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실체로 내 앞에 계셨다.
그분은 존재 자체로 완전하셨고 숨 막히도록 압도적이었다.
엄청난 환희와 기쁨이 내 전 존재에 번져갔다.
이 경험을 해보지 않고서는, 그 영광을 맛보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만났다’라는 의미를 결코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내 존재가 소멸하는 즐거움을 느꼈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내 존재가 소멸하는 즐거움을 느꼈다.
그토록 나를 누르던 자아와 인생의 무게가 한순간 먼지처럼 사라졌다.
이 기적은 예배하는 내 영혼에 베풀어졌다.
어떤 상황과 조건에도 제한받지 않고 그분을 예배하는 것만으로
언제든 영원하고 순전한 기쁨에 잠길 수 있다는 사실에 소망이 생겼다.
그분의 위엄과 존귀와 광대하심과 아름다움 앞에서 인생의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분의 위엄과 존귀와 광대하심과 아름다움 앞에서 인생의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오로지 그분을 예배하는 기쁨만이 가장 실체적이고 무한한 행복이었기에 삶의 다른 목적은 멀리 물러갔다.
단 한 번의 운명적 예배 이후, 내 영혼을 관통한 사랑을 느꼈다.
단 한 번의 운명적 예배 이후, 내 영혼을 관통한 사랑을 느꼈다.
이 사랑은 사랑하기에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던 이전의 사랑 공식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 사랑은 ‘완전’했다.
단 한 번의 예배로, 그때까지 내 속을 가득 채웠던 두려움 없는 사랑에 대한 깊은 갈망과 결핍이 완벽히 채워졌다.
영혼의 빈 잔이 넘치도록 채워진 것이다.
나는 이 사랑의 절정에서 결단했다.
‘내 삶을 여기에 걸어야겠다….’
-여섯 걸음, 원유경
나는 이 사랑의 절정에서 결단했다.
‘내 삶을 여기에 걸어야겠다….’
-여섯 걸음, 원유경
† 말씀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 시편 63편 4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 시편 63편 1절
† 기도
아버지 하나님, 내 심장 깊은 곳에 불꽃처럼 타오르는 예배를 향한 그치지 않는 갈망함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 시편 63편 4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 시편 63편 1절
† 기도
아버지 하나님, 내 심장 깊은 곳에 불꽃처럼 타오르는 예배를 향한 그치지 않는 갈망함이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향한 강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내 안에서 일하소서. 주님으로 인해 내 영혼의 빈 잔을 넘치도록 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