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싶은 수필

화가 홍성담을 듣다

안규수 2014. 9. 5. 09:02


 

 대학을 다닐 때 2학년 까지 교양과정을 하는데 음악과, 국문과, 무용과, 미술과, 같이 수업을 했는데 대부분이 여학생들이다. 남학생을 전부 다 합치면 30여명 된다. 술자리에서 ‘예술 중에 시가 최고다, 소설이 최고다, 예술 중에 미술이 가장 최고다‘라는 부질없는 논쟁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 그렇게 한마디로 정의가 된다.
 문학이나 시나 에세이이나 글로써 한 문자 예술, 형태가 남는 미술, 연극, 영화 이런 모든 것들이 없어도 우리가 뭐 그렇게 팍팍한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음악이 없으면 숨쉬기가 어렵다. 그만큼 모든 예술에서 가장 궁극적인 자기 예술이 되고자 하는 상태, 이루고자 하는 상태가 바로 음악이다.
 왜 그러겠는가.
 우리는 성경책을 보면 태초에도 소리가 있었다. 한글로 번역하면 말씀이라고 하는데, 생명체가 생명체임을 증거하고 나타내고 존재하는 그것이 일종의 진동이다. 소리를 다른 말로 하면 진동이라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상태 때문에 음악을 동경하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뭐가 있을 것인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어차피 인간이 갖고 있는 커다란 싸이클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싸이클.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사계절의 싸이클. 하루라는 아침, 점심, 저녁, 밤이라는 싸이클. 아주 극소하게 쪼개고 쪼개면 마지막 남는 것은 진동, 즉 떨림일 것인데, 그것은 생명의 떨림일 것이다. 삶의 원리가 떨림인가? 왜 모든 예술이 음악을 동경하는 것인가.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음악을 좋아한다. 음악을 직접 하기도 한다. 제대로 된 소리를 재현하기 위한 일을 하기도 한다. 나는 오디오 광이다. 스피커 알맹이을 유니트라 하는데 외국에 가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그것을 사 갖고 온다. 스피커 도면를 보고 적절한 박스를 제작해서 유니트를 넣어 스피커를 만들어 이름을 붙여서 판다. 그림을 하기 위한 가장 큰 알바이고 브랜드는 ‘여명’이다.
 소리, 음악을 찾는 것, 이것도 하나의 편향인데, 정신 건강 의학에서는 편향증이라고 하는데 내 그림이 소리와 음악과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그림이 시와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에 맞는 시를 발견하진 못했다. 릴케, 랭보, 워즈워드에서도, 우리나라 시뿐만 아니라 외국의 시들 속에서도 한 번도 내 그림과 닮은 시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산문에서 리듬이 있다면 에세이라고 생각한다. 에세이에서 일상과 자기가 일상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이 리듬을 에세이에서 구현하지 못하면 자칫 소설이 돼 버리거나 하품의 시가 된다. 
에세이에는 리듬감이 있어야한다. 에세이를 하는 사람은 음악을 이해해야 하고 음악을 꼭 해야만 하고 음악과 같은 삶을 살아야한다.
 에세이를 쓰는 자세란 무엇인가. 그 짧은 글에서 우주의 법칙과 우주의 원칙에 따라 돌아가는, 자신의 속에서 우주가 돌아가는 자신의 법칙이 우주랑 맞지 않는 불협화음, 잘 맞춰서 돌아가는 즐거움…喜, 그 즐거움...樂, 遙. 양날의 칼인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에세이라는 한자는 글러먹었다. 물 흐르듯이 쓴다? 절대 그렇지 않다. 영어로서는 적당하다. 외국 대학에서는 계획에서 결과까지, 정리, 기안, 중간보고 모든 할 일을 모두 에세이라고 한다. 에세이라는 개념, 한국적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야겠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얘기할 적에 그 현상을, 그 대상을 부르는 소위 명사, 그 단어가 내용을 변화시켜 버린다. 밥을 똥이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듯이 이름이 내용을 좌지우지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본다.
 에세이의 개념 자체를 명확하고 아주 현실적으로 다듬을 필요가 있겠다. 그런 에세이를 쓰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생각해 봐야 하는가. 되묻는다. 나는 순수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에세이를 쓰는 사람은 순수해야 한다. 에세이를 쓰는 사람의 눈과 마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해야만 에세이를 쓸 수 있는 결을 발견할 수 있다. 여름날, 아침 내리는 이슬보다 수정보다 다이아몬드보다 더 순수해야한다. 그렇다면 우린 순수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를 할 것인가.

 민대변인은 뭐같이 생겼다. 사람은 관상이 굉장히 중요한다. 관상을 얘기하면 인권에 문제라고 하는데 사람이 자기 표정은 자신이 만든다. 아니 그럼 왜 우리가 풍경을 봅니까. 사막이나 황야를 봐도 좋은 풍경을 봐도 변화가 없어야지. 또는 부잣집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좋은 곳에 모시려고 풍수를 보고 좋은 곳에 묘를 쓴다. 왜 어마어마한 땅을 찾아서 묘를 쓸까. 땅의 관상 때문이다. 세월호 유가족이 대통령을 만나려고 청와대쪽으로 가다가 경찰하고 대치되었다. 이때 민 대변인은 가족 중에 순수하면 만나주게 하겠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순수라는 말에 아주 불순한 색깔이 칠해져있다. 나는 여기, 순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순수란 말의 가르침이 안 나온다. 어린이처럼 욕심을 갖지 말고 순수해야만 천국에 들 수 있다고 예수도 얘기한다. 아무도 이런 것이 순수하다고 아무도 가르쳐주거나 얘기해 주지 않았다. 순수라는 개념이 어려웠다. 명색이 예술가 입장에서 순수하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대학 때 읽었던 루소의 저작 백지와 같은 상태, 화이트보드 라틴어로 타불라 라사 tabula rasa (하얀종이)다. 소위 백보드이다. 어떤 색감에도 그 종이에 발라본적이 없는 태고의 순수, 태초의 순수, 태초의 하얀 색. 물론 루소는 ‘따불라 라사’라는 단어를 쓰면서 그것이 순수하다고는 얘기하지 않았다. 자 여러분, 이 하얀색 이것을 ‘따불라 라사’라고 했을까. 그런데 왜 루소가 이것을 순수라고 했을까요. 사람의 손길이 타면 하얀색은 금방 때가 탄다. 내가 그림 그리다가 빨간색을 튀기면 아! 빨갛구나 하고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그런데 여러분, 회색은 사람의 손길이 백번 묻어도 모른다. 빨간색이 튀어도 모르고 파랑색이 튀어도 모릅니다. 뭐 좀 튀긴 튀었다. 바로 그것입니다. 순수라는 말이 흔히 대한민국에서는 순수라는 말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를 순수라고 합니다. 빨간색이 튀어도 반응이 없고 파랑색이 튀어도 반응이 없고 여러 사람이 주무르고 다녀도 별 반응이 없는 그러니까 저항이 없는 사람이다. 자기표현이 정확하지 않는 상태를 순수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틀려먹었습니다.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요. 위정자들이 국민들을 자기들 입장에서 편안하게 끌어갈 수 있도록, 이렇게 자기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런 순수를 그런 회색, 어떤 색이 부딪쳐도 저항하지 않는 더러운 구정물로 만들어 놨다.


 에세이스트들은 끊임없이 자기 마음을 가슴을, 자기 시선을 따불라 라사로 끊임없이 닦아내는, 또 닦아내는 자기의 일상 속에서 따불라 라사에 비춰 놓고 무엇을 튀어내는가 생각해야한다. 현실이 어떤 색깔을 가져오는가.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충격을 느껴야한다. 예술에서의 충격은 희노애락의 모든 감정적 전달을 의미한다. 가감 없는 터불라 라사에 반응할 수 있어야한다. 현실에 대해 자세하게 반응을 해야 한다. 이것이 슬픔의 속삭임이구나 아! 이것이 기쁨의 노래이구나. 저는 그래서 수필가는 매번 자기가 발을 붙이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자상하게 관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냥 타불라 라사가 가슴에 붙이고 있어서 다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10년째 감나무에서 입을 벌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가 아무 노력을 안하고 있는 줄 안다. 관찰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사람들은 관찰을 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상황에 마딱뜨리면 눈을 꽉 감고 묵상을 한다. 그리고 단어를 생각한다. 무슨 단어로 멋지게 만들어 낼까. 이건 재주다. 그러면 감동이 절대로 줄 수 없다. 그림에서도 그렇다. 현실에서도 자상하게 관찰을 하려면 현실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 지극히 현실을 사랑해야 한다. 나와 접해 있는 모든 것,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사람이든 짐승이든 사랑해야한다. 그래야 그들이 반응하는 것을 쉽게 읽어낼 수가 있다. 이것을 소통이라고 한다. 소통이라는 것은 남이 기뻐하는 것은 둔감하게 알아낼지라도 남이 괴로움 속에 슬픔 속에, 죽음과 같은 고통에서 울부짖는 일에 반드시 응답을 해주어야한다. 자상한 애정이 있어야한다. 이것이 바로 에세이스트한테는 예술적 응답이다.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 생명을 사랑하기는 다 쉽다. 김지하처럼 말만은 쉽다. 내가 너무 진실을 얘기 했나. 생명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자기가 생명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생명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럼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니까 허무주의자는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 허무주의자는 가장 오래 삽니다. 대체로 세계적으로도 허무주의자들이 가장 오래 산다.
 노르웨이 화가 뭉크의 절규, 그 사람은 죽음의 공포 때문에 사람들을 절대 안 만난다. 항상 죽음에 직면해 있다. 자기 어머니를 그려도 그 사람은 마을의 축제를 그려도 유령들이 둥둥 떠다닌다. 철저하게 죽음과 싸워 온 사람이다. 뭉크는 늘 철저하게 죽음과 싸웠다. 그 사람이 구십 몇 살까지 살았다. 자기 인생에서 철저하게 허무를 느낀 사람은 그 허무가 생명과 삶에 의해서 선택한 허무일진데 절대 자살을 하지 않는다.  
 그런 예술가를 놓고, 회고록이나 예술가의 전기에 보면 허무의 끝까지 갔다고 쓴 사람들이 많다.
 고은도 틀렸다. 1973년 문학과 사상에 고은이 이중섭 평전을 연재했다. 문학과 사상이 잘 한 점은 제 입장에서 볼 때 두 가지가 있다. 고은이 이중섭평전, 마르게스의 백 년동안 고독을 연재했다. 지금은 문학과 사상은 없어졌나, 쓰레기가 되었나? 이중섭이 아니라 이건 전부 고은의 모습이다. 제가 맥주를 먹고 하루 동안에 50편의 시를 썼다. 술을 먹어도 시는 잘 쓸 수 있다. 그림은 손이 떨려서 안된다. 그리고 그림은 분석이다. 형태가 있으니까. 화가가 그리고자 하는 사물이 자기 몸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 육화관계를 거쳐서 팔로 전달이 돼서 그림으로 나온다. 고은에 의하면 술이 취해서 이중섭이 광기에서 그림이 나왔다고 했다. 술을 먹고 그림을 그렸다고 했기에 70년대 그 시절의 화가들이 전부 술을 좋아했다

 기본적으로 생명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과 투쟁하는 것.
생명, 아! 이것 너무 예뻐, 이건 정상이다. 생명을 위협하려는 악마적 존재와 투쟁하고, 그리고 이것을 사랑하고 이 양면성이 나타나야 이것이 진정한 생명주의자다.
서정을 쓰는 것, 사기일 수 있다.


생명을 사랑하다는 것,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다. 자기가 자기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철저하게 회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부정 하는 것, 그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으로 부터 시작한다. 끊임없이 언젠가는, 한두 번쯤은  젊은 날에 자기 자신을 삶과 죽음의 경계선 안에 밀어 넣는 사람이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생명의 위대함을,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가 신이라는 정의를 깨닫게 된다.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고통 받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그 고통의 과정을 거쳐 나가야 한다. 이건 신화에서 보면 알사상이다. 알에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가 크다. 고주몽도 그렇고. 
 세상과 단절된 그곳이 바로 죽음이다. 알을 깨고 빛을 발견한다. 빛이 생명이다. 생명은 자기가 발견하는 것이다. 
 이외수의 <변태>에 보면, 이외수를 한 번도 안 읽어서 모르겠다. 분명히 이외수도 얼마나 지고한 순간을 넘겼겠나. 이명박 4대강 살리기에서 쭉 지켜보았고, 박근혜 정권에서 어둠의 세계에 깊이 들어 간 것 같다. <변태>는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변했다가 나비로 나가는 과정, 깨어난다는 것 같다. 어째든 삶과 죽음에서, 경계에서 인류의 보편적인 자기만의 사랑을 획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성찰이다. 그런 자만이 자기 가슴의 붙인 타불라 라사에 반응한다.
 현실의 희노애락을 체크한다. 나는 에세이가 바로 그것이다. 소설이나 그림은 직조를 해 나간다. 에세이는 좀 더 다른 문학적 영역이다. 그 순수성을 바탕으로 논리적이든 비논리적이든 모든 것을 떠나서 자기만의 성찰을 현실을 대리하며, 섬광과 같이 현실을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에세이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에세이 안 써야 한다.
 주부 수필이나 일기가 에세이가 아니다. 저는 그래서 에세이를 무엇으로 해석을 할 것인가. 라는 총론적인 이야기를 했고, 구체화시키면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제대로 된 에세이를 읽어 보지를 못했다. 분명히 있을 텐데. 시간이 없어서….

 

  2005년부터 야스쿠니 신사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아시아가 갖고 있는 모든 국가주의의 문화적 형태, 야스쿠니의 저 시커먼 고통스러운 어둠속에 이것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이건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위 유교적 전통적인 시대를 겪었던 동아시아권이 공히 같은 그러한 어두운 측면이 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에도 있다. 앞으로 갈수록 중국이 발전하면서 동아시아를 위협하게 된다. 그래서 야스쿠니를 그리기 시작했다. 일본 공부를 무지하게 했다. 우리나라는 일본학을 아주 전통으로 공부한 사람은 몇 사람 안 된다. 그런데 일본에 가면 한국에 대한 공부를 어마어마하게 한다. 예를 들어 본인의 민중미술을 학위 논문으로 쓴 사람이 서너 명이나 있다

  일본하면 제국주의라고 해버리면 다 끝난다. 그러니까 친일한 사람이 모든 부분을 휘어잡고 있다. 세계 누구도 일본과 중국을 우습게 보지 않는다. 세계에서 미국을 무시하는 것은 북한밖에 없다. 형제끼리 치고 박고 싸우면 다 똑같은 것이다.
 제가 일본을 연구하면서 아주 놀라운 영역을 발견했다. 일본을 연구하면서 느낀 건 정말 만화 같은 나라이다. 정말 만화다. 일본의 근현대는 만화이다
 일본사람은 ‘마른 멸치를 가지고 이것이 용이다’ 라고 계속 얘기를 하면 그것을 정말 용으로 본다. 일본의 근대사, 천황제라는 것이, 태초부터 천황이라는 것이 있었다. 400년 정도 제정일치시대에 정권을 잡고 그 이후에는 몰락을 했다. 에도 말기에는 천황이 교토에 살면서 아침 먹고 점심을 걱정할 정도였다. 속옷을 석 달 입었다.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영국 같은 왕을 갖자. 그러면서 천황을 데리고 온다. 꼭두각시다. 전통을 조작했다. 그것이 진실이 되어 버렸다. 일본, 참 묘하다. 우리와 많이 닮아있다. 
 아주 놀라운 것은 일본의 하이쿠, 일본의 정형시,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다. 선시하고는 또 틀리다. 이것을 뭐라고 할까. 각 행을 오음 칠음 오음 합계 17음으로 딱 끝내야 된다. 일본의 문화적 정통이 그렇지만 순간적으로 일어난 상태를 갖고, 현상을 갖고 우주를 포함한 자기의 모든 것을 얘기를 하여야만 한다. 그 중에 17세, 에도시대에 제일 발전하게 되는데. 바쇼의 시. 사무라이는 계급이다. 양반계급, 관리계급 그리고 평민이 있고 또 귀족계급이 있겠고 그 귀족들 영주들 밑에서 그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을 사무라이라고 한다. 관리인의 표찰이 일본도이다. 관리인을 상징하는 것이 일본도이다. 경찰관이 총을 차고 다닌다고 총을 다 잘 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그 상황에 순간을 포착해서 그 순간에 우주의 질서를 순간적으로 찰나적으로 담아낸다.

바쇼의 시중에서 
고요함이여(玄) 우주의 고요함, 마음의 고요함)
바위(강성, 단단함))에 스며드는 매미소리(流)

강과 유가 합쳐져서 내 마음의 고요함을 만든다는 뜻이다. 에세이는 형식구조 양식을 얘기하는 것, 타불로 라사를 통해서 감지하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순간의 포착, 이것이 바로 내 현실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보편적 현실로 딱 들어내야만 하는 거대한 양식적 구조가 에세이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에세이는 대단한 중요한 예술적 장르이다. 그래서 여기 모인 여러분들이 굉장히 귀하게 여겨진다. 
 너무 본격 문학하면서 에세이를 우습게 생각하고 에세이는 대충 아무나 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피천득의 붓 가는대로 쓴다는 것은 비겁한 말이다. 붓 가는대로 마음가는대로 쓴다는 것은 말이 되는가.

 미안하다는 말은 비겁하다는 말이다 세월호가 잘못되기까지 우리 사회의 잘못된 무엇이 있다. 친구 지간에 미안하다고 하면 귀싸대기 때리면 욕을 할 것이다. 이것은 몹시 비겁한 말이다. 세월호의 상징적인 단어가 되었다. 나는 300명이 죽든지 말든지 나는 거기에 관여하지 않겠다?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10년 후에 행동하려고? 세월의 상징적인 단어가 되었다. 자기 성찰이 없다.
 아이들에게 사교육을 시켜 신분 상승시키려고 하고, 아파트 평수만 넓히려고 한다. 주식의 숫자를 보면서 아침마다 눈이 벌개있느냐고 한 번도 성찰을 해 보지 않았다. 상대방이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자기 성찰없이 소통도 없이 우리가 살고 있다. 박근혜의 연배가 모두 소통이 안 되는 나이다, 박근혜는 국민을 대표해서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이다. 우리가 다 박근혜라 생각하면 된다.

 

 제가 에세이를 들여다보는 관점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를 했다.
제 그림이 달리하고 같은 맥락은 꿈을 그렸다. 나는 꿈 그림을 통해서 나의 역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고 나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역사란 무엇인가. 나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것이다. 달리는 단지 향상성의 세계, 형식적인 세계, 시선의 유희, 특별한 시선의 광범위함. 이런 것들의 표현이다.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림 언어가, 타불라 회화가 갖는 어려움이 있다. 포스터가 되면 아주 쉽다. 그러나 사실 제 그림은 보기만 해도 쉽다. 내 그림 앞에서 어렵다는 사람들이 자기들은 점하나 찍어 놓은 그런 추상화 앞에서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하지 않아요. 포스트모던에 입각한 칼과 선 몇 개 그려 놓고 다 아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내 그림은 어린이 그림책 수준 아니예요? 어려워졌다고 하니까 글로써 설명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욕심이 있다. 비평과 문학평론의 세계는 아주 험하다. 외국에서 만들어낸 라깡과 들뢰즈, 데리다 라는 외국의 공식을 갖고 우리나라에서 써 먹는다. 당사자도 뭔 말인지 모른다. 라깡의 미학에 대한 건 20페이지도 안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내 그림을 라깡을 갖고 풀었다. 젊은 사람이다. 제가 그런 것을 눈감아주면 별 문제가 없는데, 시간이 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면 전의가 일어난다. 우리사회는 담론이 형성이 안 된다. 백낙청이 별스런 담론을 내 놓아도 아무도 답변이 없다. 너무 시간이 없어 담론이 형성 안 된다.
우리나라 속담에 ’못난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잘난 자식 나둔 부모 보잘 것 없다.’ 는 말이 있다.
백수가 있어야 부모를 모신다. 자식들이 잘났으면 아무도 부모를 모실 사람이 없다. 일주일 동안, 백수로 있는 동안 내 비평 쓴 것을 시정했다. 제 마누라가 정신과 의사이다. 마누라 동기가 라깡 연구소의 소장이라 도움을 받았다. 라깡의 인용 부분이 잘못되었다. 해석이 잘 못된 문장으로 나를 비평을 해놓았는데 누군가 그 비평을 칭찬했다. 나는 그 꼴도 못 본다. 비평한 사람한테 원전을 그대로 제시하면서 죽사발을 내 버렸다.

 

 여러분! 삼국유사를 천천히 봐라. 현장을 가라. 기가 막히다. 정말 시각적이다.삼국유사에 화랑 두 명이 술을 먹고 맘이 맞았다. 둘이 밤길을 걸어간다.
일연스님이 뭐라고 했냐하면. 우리 같으면 달빛이 쏟아졌다, 그래서 길이 환하다. 그렇게 쓸 것인데, 달빛이 어둠을 쓸어냈다. 달빛이 어둠이 쓸어버릴 정도로 밝아진 것은 둘이 소통이 되었다는 얘기이다.
 그 다음은 원효의 화엄이다. 화엄은 대한민국에만 있다.
 그 다음은 샤머니즘 이다. 샤머니즘과 가장 가까운 것은 진도의 씻김굿이다.
 동해의 굿은 여자들 다섯 명이 나와서 꽃춤을 춘다. 정말 생명이, 거대한 생명이 땅에서 기어 나온다. 그리스로마신화는 아무것도 아니다. 제주도의 신은 만 팔천 이백 명이다.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신이 아닌 것이 없다. 창조하는 설화는, 마구할멈 신화는 동아시아의 공통된 신화이다. 중국에도 있고 타이베이에도 있다. 건국신화하고 창조신화하고는 다르다. 그런데 창조신화는 설문대할망구부터 시작했다. 뭐 요즘 뻑하면 그리스 어디니 팩키지 여행을 떠나는데 별것 없다.
 제주도에는 인간의 욕망이 더덕더덕 붙어있는 거룩한 존재로서의 신이 있다. 제주도는 올레길 때문에 다 버렸다. 제주도 가서 우리 신화를 공부하자. 남의 조상은 줄줄히 공부하면서 우리 신은 물으면 단군 밖에 모른다. 제주도 신을 잠깐 공부하고 제주도를 걸어라. 자기 발을 갖고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신이 아닌 것이 없다. 돌멩이 하나에도 신이 있고 돌멩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신들은 융의 애기처럼 집단 무의식 원형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문화의 생산물들을 비평하고, 피카소도 우리의 시선을 갖고 들여다 봐야한다. 제가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한 우리의 집단 무의식을 에세이는 충분히 쉽게 그려낼 수 있고 담론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이다.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비평가들하고 싸우기 위해서였다. 비평가들이 전부 서울대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제 그림을 아무도 비평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도 쓰지 않으니까 김지하가 썼다. 제가 바리를 전시만하고 말아버렸어야 하는데 맞춤법도 모르고 글을 쓰느라고  고생을 무지하게 했다. 시인이나 소설가한테 우리 문학의 정체성의 문제를 이것으로 되묻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계에서도 아무 소리없고 미술계에도 아무 소리도 없다. 


*에세이스트 포럼에서 퍼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