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편지

약함이 싫다

안규수 2015. 2. 25. 17:36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 지요?


오늘은 어느 블로그에서 발췌한 <약함> 이라는 글을 함께 나누길 소망합니다. 

조금 긴 글이긴 하지만...

약함으로 인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우리 모두에게 귀한 메시지를 주는 글이라 함게 나누길 소망합니다. 

조금 긴 호흡으로...^0^ 


약함이 싫다.

마음이 상한다.

떨쳐버리려 애써보지만 

부피는 줄어도

밀도는 더 커진다.

약함 땜에 포기해야 했던 많은 것들.

그럴싸하게 포장 할 순 있지만

떠나진 않는다.

그것이 바로 나기 때문에

괴로워, 나를 못살게 군다.

숨기느라 껴입은 두터운 갑옷들

모양새는 우스워지고, 엉거주춤한 동작들…

알면서도 그 꼴이 되어가는 나의 한심스러움.

누르고, 구박하고, 무시하고, 때론 얼러본다.

고통 속에 기도도 해본다. 없애 달라고…

그러나 붙박이로 박혀 있는 내면의 약함들

관계를 이루고 있는 사회적 약함들 모두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키는 것 같다.

순풍에 밀려 미끄러져 갈 땐, 잠잠했다가도

이런 저런 파도 뱃머리 때릴 때

고통은 다시 온 몸에 퍼져간다.


바울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다.

율법은 물론, 스콜라 철학, 에페쿠로스 철학들을 꿰뚫었다.

삼층천 투어를 통해 천국복음의 요지도 꿰찼다.

기독교의 터를 닦았다고 인정받는 사람이다.

신약성경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대단하다.

3차에 걸친 교회 개척 여행 통해 뿌린 씨앗들.

2천년에 걸친 그 열매들을 측량할 수 있겠는가?

육의 사람이었을 때나 영의 사람이었을 때도

그는 항상 범인이 이르기 쉽지 않은 

어떤 영역의 끝선에서 주로 그의 삶을 이뤄갔다.

바울의 강함을 보면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에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몸 안에 가시, 사단의 사자가 들어 있었다.

그의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할 순 없지만,

바울은 그 가시를 없애주실 것을 

세 번에 걸쳐 하나님께 호소했다.

단순히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가 감당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보자.

기독교의 터를 닦아야 할 사명이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에 흘려보내야 할 사명이 

그에게 안겨졌다.

율법과 은혜의 법을 대정리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야 하는 부담이 

그의 어깨 위에 얹혀져있었다.

그가 이동해야 했을 거리를 생각해 보자.

그가 매 순간 부딪혀야 했을 영적 세력들을 생각해 보자.

만약 가시가 없었다면, 

더 많은 일들을 이뤄내지 않았을까?

더 많은 곳에 교회들을 세우지 않았을까?

더 효과적으로 사역들을 감당하지 않았을까?

바울의 열정과 성품으로 보면, 분명 그걸 소망했을 것이다.

땅 끝 스페인까지 복음 전파하기를 쉬지 않았던 그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고 넉넉하다"다.

주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설파한 데로

'약한데도 불구하고in spite of the weakness'가 아니라 

'약함을 통해서through the weakness' 강함이 드러나고,

'죽음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the death'가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through the death' 생명이 나타나며,

'고난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sufferings'가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through sufferings' 영광이 부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신비다.

'불구하고'는 하나님을 무능한 신으로 전락시킨다.

약함과 죽음과 고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신.

그러나 '통하여'는 능치 못함이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여준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약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약함은 무능한 것도 아니다.

약함은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 안에 약함을 넣어주셨다.

하나님이 솜씨가 부족해서

마지막 집중력이 떨어져서 

약함이라는 허점을 우리 속에 남기신 게 아니다.

약함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이 경륜을 이뤄가시는 

하나님 나라의 통로다.

세상은 강함을 중심으로 일하려 하나

하나님은 약함을 중심으로 일하려 하신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 자신도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셨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각양 재능과 은사를 주셨다.

비범하게 드러나는 강함, 탁월함, 효용성이다.

우리는 이것들에 마음을 다 쏟는다.

재능과 은사, 나의 강함은 배의 돛과 같다.

성령의 바람이 불 때, 

바람을 품고 인생이란 배가 쾌속 전진하게 한다.

그러나 약함은 배의 키와 같다.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같다.

강함으로 추진력을 얻지만,

방향과 정도는 약함으로 결정된다.

사람들은 약함 없다면 약함을 없애버릴 수 있다면

더 멋지게 더 멀리까지 갈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렇지 않다.

키가 없는 배,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를 생각해 보라.

육체 안에 사단의 사자, 가시가 없었다면

바울이 더 많은 사역들을 더 훌륭하게 해낼 수 있었을까?

바울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너무 커서 

자만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만약 가시가 없었다면

더 멋지게 더 많은 일을 더 잘하는 것이 아니라

망하게 되었을 것이란 말이다.

바울은 주님의 응답을 통해 깨달았다.

가시 때문에 크게 기뻐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랑할 일이 있다면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라고 외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1210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하지 않으리라.

내가 약한 그 때에 진정으로 강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강함을 주신 하나님이 약함도 함께 주셨다.

강함이 우리의 인생을 전진시킬 때

약함은 우리 인생의 방향과 정도를 한정시킨다.

약함 때문에 속상해 하지 말라.

약함은 하나님의 은혜다.

내가 진정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러낼 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강함이 드러난다. 

역설이다.

세상은 강함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강함으로는 절대 세상을 이길 수 없다.

우리가 그 정도의 강함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의 약점이 바로 약함이다.

세상은 약함을 견디지 못한다.

세상은 약함을 저주한다.

약함은 세상의 아킬레스건이다.

창조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의 손에 붙들려 

십자가에 매달리는 약함을 보이셨다.

죽음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세상 임금의 철퇴에 

죽음을 맞으셨다.

침 뱉음과 뺨 맞음, 조롱과 저주, 채찍과 가시면류관,

그리고 무시무시한 대못의 위력 앞에 꿇어 

고난의 잔을 받으셨다.

십자가의 신비다.

약함을 통해서 

죽음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있는데도 불구하고가 아니다. 

통해서다.

이젠 이런 저런 약함을 숨기지 말자.

인정하고 오히려 자랑하자.

그 약함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을 보여줄 수 있다.

그 약함이 내가 가야할 길을 보여줄 수 있다.

그 약함이 나로 하여금 하늘의 자원을 받게 할 수 있다.

그 약함이 사람들을 살리는 구원의 밧줄이 될 수 있다.

약함이 문제라고 생각하면

방황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 선생님은 ‘사람에게는 네 가지 믿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목사님은 첫 번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분명히 머지않아 자신에게 실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둘째, 친구에 대한 믿음입니다. 

목사님은 아무리 절친한 관계라도 오래 유지하기란 쉽지 않으며 유지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죽음으로 이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셋째, 권력과 물질에 대한 믿음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확실하게 믿는 것이 이 믿음이지만 이것을 믿고 또 얻는다 해도 

결국 다른 사람들의 질투와 시기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넷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무디 선생님은 사람의 모든 믿음 중에 가장 가치 있고 귀중한 것은 이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현재의 삶을 넘어 영원의 삶을 보장하는 유일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믿을지 모르겠다면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절대로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무디 선생님은 자신 있게 믿음의 필요성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권하는 충실한 주님의 일꾼이 되십시오. 


주님! 참으로 가치 있는 믿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소서!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권할 만큼 믿음에 확신이 있는지 생각하십시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