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초리 보자기/이민혜
열 살 되던 해 봄, 처음으로 싸릿가지 회초리의 맵디매운 맛을 보았다. 황금색 저고리에 꽃자주색 비단치마 받쳐 입고 외가댁 잔치에 갔던 날이었다.
“뒷동산에서만 놀아라. 무심천 건너편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폭넓은 옥양목 앞치마를 두르고 분주하게 과방을 지휘하시던 어머니는 집안 아이들과 놀러나가는 나를 불러 세우고 귀가 닳도록 들어온 주의를 거듭 다짐하셨다.
마을 앞을 흐르는 무심천 건너편에는 일제 때 사금을 채취하느라 파헤친 크고 작은 물웅덩이와 자갈더미가 산재해 있었다. 그곳에는 아직도 사금이 심심찮게 나온다느니 물 반半에 고기가 반이라느니 으스름달밤에는 처녀귀신이 나온다느니 별의별 소문이 떠돌았다. 가끔씩 뜬소문에 솔깃하여 사금을 캐던 사람과 고기 잡던 아이가 물에 빠져죽는 사고를 당하곤 했다. 마을 어른들은 그걸 마치 처녀귀신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처럼 내세우며 아이들을 물웅덩이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하지만, 어른들의 눈을 피해 살금살금 그곳에 드나들며 고기 잡기며 갖가지 물놀이를 하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닌데 그 좋은 놀이터를 호기심 투성이들이 쉽사리 포기할 리가 없었다.
“물수제비 뜰 사람 여기 붙어라. 여기 붙어라.”
동구 밖에 나서자마자 대장격인 외당질外當姪이 집게손가락을 곧추세워 머리 위로 흔들었다. 아이들은 돌격 명령이라도 내린 듯 왁자그르르 소리치며 무심천으로 달려갔다. 봄가물에 시냇물이 졸졸거리고 있었다. 수제비를 뜨려면 아무래도 무심천 건너편, 수량水量이 넉넉한 제일 큰 물웅덩이로 가야만 했다. 어쩐담. 무심천 건너편에는 얼씬도 말랬는데. 손이 스멀거렸다. 에라, 모르겠다. 물수제비라면 물러설 수 없잖은가. 마침내 나는 고무신을 벗어들고 무심천을 건너 뒤질세라 아이들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너도 나도 만만하게 생긴 돌을 찾아들고 잔물결 일렁이는 수면을 향해 몸을 낮추었다. “에이. 겨우 두 번” “쳇. 꽝이야” “와~ 일곱 번이다.” 얇고 둥근 돌이 검푸른 수면을 담방담방 건너뛸 때마다 박수 소리, 탄식 소리,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아지랑이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들녘에 울려 퍼졌다. “와~ 또 일곱 번이야” 번번이 수제비를 일곱 번 뜨는 내가 주위의 부러움을 독차지하고 있을 때였다. 자갈더미 중간쯤에 서서 구경을 하던 병약한 은실이가 맥없이 쓰러지더니 자갈과 함께 굴러 내렸다. 아차, 하는 사이에 가속도가 붙은 은실이의 몸이 물가에 바짝 다가서 있던 나를 덮쳤다. ‘텀부덩~’ 격렬한 파문이 웅덩이 가득 번졌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의 송곳같은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촌각을 다투는 다급한 순간에 자맥질 잘하는 외가댁 작은 머슴이 인근에서 밭갈이 하다 번개같이 달려왔다.
꿈엔들 잊겠는가. 물속에서 내 치마를 움켜쥐고 천근의 무게로 매달리던 은실이와, 내 뒷덜미를 우악살스럽게 틀어쥐고 물 밖으로 끌어 올리던 작은 머슴의 덕석 같은 손을.
우암산을 훌쩍 넘어온 보름달이 잔치 파한 너른 마당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물귀신은 가까스로 면했지만 어머니의 경고를 무시한 벌은 면할 수가 없었다. 종아리를 걷었다. 질책은 서릿발 같았다.
“가지 않는다고 약속했지. 분명히 약속했지.”
회초리가 사정없이 날아왔다. 살을 파고드는 싸릿가지의 맵디매운 맛에 헉헉 숨이 막혔다. 평소에는 나에게 그리도 자상하던 큰외숙모마저 어머니의 혹독한 매질을 말리기는커녕 당연하다는 듯이 뒷짐 지고 바라만보고 계셨다.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더니 정말 주워온 게 분명해. 집안 아이들 여럿이 갔는데 유독 나만 싸릿가지가 부러지게 때리잖아. 외숙모는 뭐야. 구경만하고.’ 억울하고 분했다. 잘못했다는 뉘우침보다 주워온 아이라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서러움이 구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선잠을 깼다. 매 맞은 종아리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아랫방에서 어머니와 외숙모가 나직하게 주고받는 이야기가 빠끔하게 열린 칸막이 틈새로 새어 나왔다.
“해방된 이듬해였어요. 일본군에 나가서도 무사했던 셋째가 강물에 빠진 어린제자 살려내고 제 목숨 잃은 게. 생때같은 녀석을 허망하게 보낸 지 삼년도 못 되어 농장저수지에서 여섯째가 변을…, 그리도 야무지고 총명하던 중中 3짜리 어린것이 글쎄….”
아슴푸레 남아있던 잠이 말끔히 달아났다. 나는 숨을 죽이며 울먹이는 어머니의 애잔한 목소리에 귀를 모았다.
“제겐 물이 원수랍니다. 막내가 어찌 알겠어요, 비명에 간 자식들이 산에 묻히지 않고 에미 가슴에 묻혔다는 걸. 까딱했더라면 막내도 오늘…, 생각만 해도 아찔해요. 물웅덩이에 가지 말라고 그렇게 누누이 일렀건만.”
“잘했어. 다시는 물가에 얼씬도 못하게 하려고 그리 혹독하게 벌한다는 걸 나도 진즉 알아 차렸지. 그래서 말리지 않았어.”
“멋모르는 어린 것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괜찮아. 저 위해 따끔한 맛 보여준 것인데 뭘, 잘했어. 암 잘했고말고.”
나는 어머니와 외숙모의 주고받는 이야기를 엿들으며 진심으로 후회했다.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한 것도 모자라서 주워온 아이라 푸대접을 받는다고 고깝게 생각한 것을.
다음날 나는 아무 일 없이 떠오르는 따스한 아침햇살을 맞았다. 열 살의 그 봄날 아침, 철부지가 간밤 사이에 제법 철이 든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두 번 다시 물웅덩이 쪽에 발길은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이 회초리 효과라고만 믿고 계셨다.
그로부터 몇 달 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사범학교 농업교사였던 아버지는 가족들만 피난시키고 공산군이 점령한 농장에 홀로 남으셨다. 남북 이데올로기와는 상관없이 종자개량을 위해 실험재배 중인 작물과 실습용 가축을 보살피기 위해서였다. 농장은 아버지의 분신이었다. 수복 후, 농장을 지키려던 그 분의 순수한 마음이 부역죄附逆罪로 몰려 치안대에 불려 다녔다. 오래지않아 억울한 혐의를 벗긴 했지만 치안대에서 사상성 운운하며 받은 수모를 잊지 못하셨다. 1.4후퇴가 시작되자 아버지는 집안의 20세 이상 젊은이들을 인솔하고 두말없이 피난길에 오르셨다. 혹한을 이겨내며 남행을 계속했으나 날이 갈수록 두고 온 가족과 농장이 눈에 밟혀 마침내 상주에서 일행과 헤어졌다. 발길을 돌리신 아버지가 어렵사리 얻어 탄 군용트럭이 눈 쌓인 고갯길에서 굴러 내릴 줄 어느 누가 알았으랴.
우리는 아버지를 잃자 아버지가 그렇게 아꼈던 농장을 떠나야 했다. 청주시내에 집을 마련하고 큰오빠와 합가하기로 했다. 이삿날은 빨리도 다가왔다. 아버지의 손길을 농장 구석구석에 남겨 놓고 떠나기 전 날 저녁, 어머니는 논두렁에서 넘어져 진흙투성이가 된 내 발을 씻어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타이르셨다.
“새 집으로 이사하면 너는 더 이상 응석둥이가 아니야. 지금까진 선머슴처럼 행동해도 눈감아 주었지만 앞으로는 안 돼. 조카들 앞에서 고모다워야 하고 여자다워야 한다. 알았지?”
나는 ‘…다워야 한다.’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꼭 그렇게 하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 속에는 막내를 각별히 귀애하던 아버지의 자연주의 교육이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으로 바뀐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음을 땅띔도 못했다.
새 집으로 이사한 어머니에게선 찬바람이 일었다. 대가족의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남에게 맡겼던 논농사를 직접 맡아 지으셨고, 행여 딸들이 아비가 없어 본데없게 자랐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가정교육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몸가짐이 조용하고 웅숭깊은 두 언니들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흠잡을 것이 없게 소화했지만 드넓은 농장이 좁다하고 망아지처럼 뛰놀던 나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어느 날인가,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날 입었던 꽃자주색 비단치마가 겹보자기가 되어 대청마루 선반 위에 놓였다. 보자기에는 어린아이 새끼손가락 굵기의 고만고만한 싸릿가지 대여섯 개가 싸여 있었다. 어머니가 가르쳐주시는 고문진보古文眞寶를 건성으로 외우거나, 악필惡筆을 바로잡기 위한 펜 습자 연습을 소홀히 하면 어김없이 종아리를 걷어야 했다. 여유롭던 농장생활을 동경하며 여러 식구가 북적대는 생활에 불만을 터트려도, 버릇없이 기어오르는 장조카와 티격태격만 해도 보자기는 선반에서 내려졌다. 번번이 잘못이 더 큰 조카에게 갈 회초리가 내게로 왔다. 어머니는 내가 맞을 행동을 할 때마다 스스로 잘못의 크고 작음을 헤아려 매 맞을 숫자를 정하게 하시곤 눈에서 불이 번쩍하도록 맵게 때리셨다. 나는 주먹을 그러쥐며 소리 없이 외치곤 했다. 내가 엄마가 되면 내 아이들에겐 절대로 회초리 따위는 들지 않을 테니 두고 보라고.
얼마마한 시간이 흘렀던가. 나도 언니들처럼 지엄한 외가 어른들로부터 ‘범사에 청주 한씨韓氏 종가의 외손녀답다’는 흐뭇한 인정을 받았다. 나의 마음을 다잡아 품행이 방정方正 하도록 이끈 것은 회초리의 매운 맛이 아니었다. 말없이 선반 위에 얹혀있던 회초리보자기였다. 보자기가 선반에서 내려져 한 자락 한 자락 펼쳐지는 그 짧고도 긴, 가슴 찔리는 시간이야말로 회초리를 맞는 순간보다 몇 배 훈육효과를 거두었다는 것을 어머니는 알고 계셨을까.
나의 연년생 두 아들은 갈수록 청개구리처럼 엇가기만 했다. 내가 엄마가 되면 절대로 회초리를 들지 않겠다던 옛날의 굳은 결심은 맥없이 무너졌다.
“쯧쯧쯧. 에미야, 손쉽다고 아무거나 회초리로 사용하면 어떡하니. 일정한 것을 사용하곤 잘 건사 해. 미워서 때리니? 사랑의 매지.”
나의 체벌방식에 불만을 표시하던 어머니는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연분홍색 포장지로 싼 물건을 건네 주셨다. 포장지 속에는 어린 시절의 한때 내가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했던 회초리보자기가 들어 있었다.
물려주신 회초리보자기를 처음으로 사용하던 날, 나는 어머니가 하시던 대로 보자기를 무릎 앞에 반듯이 놓고 호흡을 고르며 한 자락 한 자락 펴나갔다. 보자기를 펴나가는 사이에 자식의 행동거지가 내 잣대에 어긋난다고 머리끝까지 북받치던 화가 서서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이성을 잃고 노기충천한 나에게 회초리보자기는 묵언으로 분별심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랬었구나. 보자기를 물려주신 숨은 뜻이 여기에 있었구나. 나는 천천히 회초리를 들어 올리며 어머니의 또 다른 사랑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가신지도 어언 27년. 나도 할머니가 된지 오래다. 큰손자가 초등학교에 가던 날, 오랜 세월 잊고 지내던 회초리보자기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곧바로 3층장을 뒤적여 꽃자주색 비단보자기를 찾아내었다. 그 곱던 빛깔은 조금 바랬지만 부드러운 감촉은 예나 다름없었다.
내 자식을 키우던 때만해도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리고 미운자식 떡 한 개 더 준다’ 는 말이 통했는데, 지금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고 한다. 내가 사는 시대에서 나도 자녀교육의 변화를 느끼는데 이 빛바랜 보자기를 며느리에게 대물림해야 할지말지…, 나는 회초리보자기를 손에 든 채 한동안 서성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