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저는 요즈음 1~2시경 이른 새벽
잠에서 깨는 습관이 생겨 숙면을 취하질 못하고 있는 데요,
하지만, 기도하는 시간이 늘어나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요! ^0^
마음의 여러가지 어려운 부분들이 잠잠해 지고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들이네요.^0^
그리스도인들에게 단잠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축복이지요,
하지만 잠못 이루지 못하는 시간 또한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의 시간이니 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요? ^0^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하며,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찬양하며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예배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소망하는 아침입니다. ^0^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 아침은 싱클레어 퍼거슨님의 <헛된 것에 속지 마라>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예루살렘의 기온이 뚝 떨어졌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탄로 날 위험을 무릅쓰고
대제사장 집 뜰의 불가에서 몸을 덥혀야 할 정도였다(요 18:25).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은 너무나 고통스러우셨기 때문에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눅 22:44) 될 정도로 온 힘을 다해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추운 밤에 땀을 흘리셨을까?
무엇이 두려우셨을까? 혹시 죽음을 두려워하셨는가?
물론 예수님에게 알 수 없고 불확실한 내세에 대한 두려움이 있던 것은 아니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죽을 때 느끼게 될 고통을 두려워하셨던 걸까?
그런 고통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모든 인간의 자연스런 반응이다.
십자가형은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두려움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었다.
예수님이 두려워하신 것은 단지 십자가의 잔이 아니었고, 죽음의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떨게 만든 것은 그 잔에 담긴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였다!
우리의 죄와 죄책을 지고 거룩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언약의 저주 아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그분은 극도의 공포를 느끼셨던 것이다.
아버지께 버림받을 때 느끼게 될 수치심과 내적 고통을 예상했을 때,
예수님의 거룩한 인성은 틀림없이 두려움에 완전히 압도당하셨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이다.
이것이 죽음의 진짜 의미이다.
“예수님처럼 죽음을 두려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마틴 루터의 말은 정말로 옳다.
예수님은 성경이 말하듯이 ‘죄의 삯’(롬 6:23)인 죽음을 두려워하신 것이다.
그런 죽음이란 그분의 생명이 붕괴되는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유월절 주말의 햇빛 없는 오후에 하늘을 찌를 것처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외치셨다.
아버지께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을 때 예수님은 격리와 어둠과 황폐를 느끼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지혜는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처럼 되시어 우리를 대표하고,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전부 담당하셨다는 사실에서 그분의 지혜가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와 입장을 서로 바꾸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으셨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를 전부 담당하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버림받는 내면적 어둠을 경험하셨다.
완전히 혼자가 되신 채 예수님은 ‘죄의 삯’인 죽음의 어두운 밤 안으로 들어가셨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우리처럼 죽으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하고 거룩한 분이셨기 때문에 죽음이 그분을 잡아둘 권세를 갖지 못했다.
인간적 관점에서 볼 때 처음에는 비극 같았던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열쇠요 그분의 부활을 위한 전주곡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가 단번에 영원히 용서되었다는 것을 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은 그분의 임재를 믿고 그분과 교제하며 살 수가 있다.
예수님이 그분의 영을 보내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 안에서 성장하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이사야 53장 5, 6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 로마서 4장 25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 로마서 6장 23절
우리를 위해서 모진 고통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날마다 기억하고 전심으로 감사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욥 14:10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15분’이라는 연극 작품의 내용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수재였던 한 남자는 명문대에 진학해 항상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박사 과정에서 준비한 논문 역시 학계에 호평을 받으며 장차 교수임용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위를 받기 며칠 전 갑자기 가슴에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병원을 찾아가 진단을 받은 그에게 의사는 시한부 인생,
그것도 15분밖에 삶이 남지 않았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전합니다.
3개월, 6개월 시한부는 들어봤어도 15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남았다는 말에
남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5분을 허비했습니다.
그 와중에 갑자기 전화가 왔는데, 부자인 삼촌이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을 상속인으로 지정했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박사 과정을 통해 준비한 논문이 이번 졸업자 중에 최우수 논문으로 뽑혔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는 며칠 전 프로포즈한 사랑하는 연인에게 결혼승낙 문자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낭보도 그의 수명을 1분도 늘리지는 못했고 그는 15분이 지난 뒤에 정확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유한한 인생의 결국은 허무함밖에 남지 않습니다.
천국에서의 삶과 영생의 약속이 없다면 세상의 그 어떤 즐거움과 기쁨도 스쳐가는 꿈입니다.
생의 마지막에 후회하지 않을 믿음을 간구하십시오.
주님, 가장 귀한 주님을 섬기고 전하는 일에 모든 것을 사용하게 하소서.
15분 뒤에 내가 죽는다면 어떤 후회를 할지 생각해보십시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