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편지
교만과 완고함
안규수
2015. 10. 27. 17:55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어제 밤에 마가복음을 묵상하던 중,
세리, 창녀 등 당시 죄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신 예수님...
그 예수님은
'사람들을 현재의 모습으로 판단하지 않고
사람들을 당신을 만남으로 인해 장차 변화될 모습을 보시고 판단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자칭 '의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도 변화되기도 힘든 것을 아셨던 것이겠지요.
우리들의 모습과는 참 대조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나의 관점이 바뀌길 기도하게 되네요.
현재의 보이는 모습이 아닌 장차 하나님께서 행하실 보이지 않는 일을 바라보는 지혜를 소망하는 아침입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도 A.W.토저 목사님의 <심자가에 못박혀라>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하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0^
구름이 짙게 끼면 태양의 밝은 빛이 가려진다. 태양이 분명히 하늘에 떠 있지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햇빛의 유익은 현저히 줄어든다. 이런 현상은 영적 세계에서도 나타난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베일이 드리우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영적 유익이 현저히 줄어든다.
대개의 경우, 이런 베일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는 이런 베일이 우리의 삶에 점점 더 두껍게 드리우도록 허락하지만,
대개는 그 베일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의식조차 못한다.
이런 베일 중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것은 교만과 완고함이다.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교만과 완고함이며,
이 두 가지의 뿌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이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실 우리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것이다.
우리의 교만과 완고함을 논할 때 종종 사용되는 용어는 ‘자아(ego)’이다.
이 단어에 모든 문제의 뿌리가 들어 있다.
즉 우리 자신과의 문제, 가족과의 문제, 친구와의 문제, 그리고 하나님과의 문제의 뿌리가 들어 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한 자리를 찬탈할 때이다.
우리가 그분의 자리를 찬탈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완고함 때문이다.
완고함은 영적 진보를 가로막는다. 교만과 완고함이 왜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교만과 완고함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고,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게 하기 때문이다.
교만과 완고함은 그분의 권위가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지 못하게 한다.
교만이나 완고함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고집이다.
고집이라는 베일의 위험성은 고집이 신앙 깊은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생긴다.
세상에서는 고집이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아주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고집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밀어내고 자기의 뜻을 주장한다.
언뜻 보면, 고집이 좋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집 센 사람의 계획에 반대해보라.
그러면 그 고집의 정체가 드러날 것이다. 그의 고집을 꺾으려고 해보라.
그러면 평지풍파(平地風波)라는 게 무엇인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사실, 남의 이야기는 할 것도 없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고집을 꺾으려고 할 때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고집은 하나님의 미소 짓는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고집스런 사람은 그분의 뜻이 장기적으로는 그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오직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삶의 여러 부분에서 발견되는 이런 베일들이 겉으로는 아무런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는 위험스런 것이 될 수 있다.
이것을 깨달은 신자들은 베일들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지혜롭게 피해가지만,
어떤 신자들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실수한다.
우리는 영적 눈을 가리는 베일을 찢어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미소 짓는 얼굴의 광채를 보게 될 것이다.
그분은 언제나 미소 짓고 계신다.
마귀가 그분의 얼굴과 우리 사이에 폭풍우를 일으킨다 할지라도 그분은 미소 짓고 계신다.
당신이 그분의 미소를 보기 위해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분을 가리는 베일을 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 고린도후서 13장5절
주님, 죄인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무너뜨려주시고, 제 마음에 새로운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더이상 나의 고집에 붙잡히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길 원합니다.
날마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길 노력하는 자녀되게 하소서.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주와 함께 간다면 나는 좋겠네...
그것이 우리네 삶의 고백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 삶이 좋을 때나 힘들때나
마음이 낙망될 때나 곤고할 때 일지라도.
'주와 함께 간다면 나는 좋겠네.' 라는 고백이
우리네 진심이 담긴 고백이 되길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눅 1:25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정복자 나폴레옹에게는 나폴레옹 3세라는 유약한 조카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견제 세력의 공작으로 인해 함 지역에 있는 교도소에 갇혀 있다가 측근들의 도움으로 영국으로 탈출했는데
그 강대했던 나폴레옹도 유배를 갔다 나오지 못한 터였기에 훨씬 유약하고 겨우 탈출한 3세는 숨어 지낼 것이라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혁명을 일으켜 다시 프랑스로 정권을 잡으러 떠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3세를 비웃었지만 그는 그때마다 이런 말을 하며 혁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내가 내 삼촌처럼 황제가 될 수 있을지 누가 아느냐?”
그리고 그 말대로 1848년 12월 10일에 정말로 프랑스 황제가 되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나폴레옹 3세가 유약하다거나, 2월 혁명이 바보짓이었다는 말을 꺼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을 멋대로 평가하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은 모든 미래는 하나님만 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또 나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온전히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또 주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십시오.
주님, 저의 역량과 한계를 보지 않고 주님의 전능함을 보게 하소서.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말을 매순간 삶에 적용하십시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