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편지

주 예수를 믿으라

안규수 2016. 4. 2. 14:59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 지요?

하노이에서 아침을 맞고 있습니다

하노이는 우중충한 날씨이긴 하지만 비교적 포근한 한국의 초봄 날씨인 듯 합니다. ^0^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존경합니다. ^0^


오늘 아침도 박영철 교수님의 <구멍 난 복음을 기워라>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그동안 기독교는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 다양한 방법들과 전도훈련을 개발해왔다.

누구나 알기 쉽게 전한 복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쉽게 이해하고 믿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은 분명 바람직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복음 전도가 가져다준 피할 수 없는 어두운 면이

도를 지나칠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복음을 믿은 사람들이 복음을 단순히 천국 가는 보증수표 정도로 이해하여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만족해하면서

그리스도께 온전히 굴복하는 삶과는 여전히 무관하게 살아가는 이상한 결과를 낳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구세주로 소개하고 전해줌으로써

그분을 구세주로 믿기 시작한 개종의 시점으로부터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진정한 복음의 핵심적 개념이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핵심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믿기로 결심한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은 너무도 좋고 감사한데

주님으로까지는 믿고 싶지 않다고 반응하는 괴물 같은 교인들이 양산(量産)되어 온 것이다.


구원은 확신하는데 삶은 여전히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복음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복음인가?

왜 이토록 복음이 왜곡되고 훼손되었는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동안 간단하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개발되어온 복음 메시지 전달 방식이

오히려 복음의 내용을 그토록 허약하게 만들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짧은 시간에, 크게 부담을 주지 않고, 쉽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려다보니

복음 메시지를 제대로 전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한다.

그 결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만 오해하면서 믿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가져다준 결과가 예수님을 구세주로는 믿는데

주님으로는 아직 부담스럽다는 고백이며,

이로 인한 신앙과 생활의 괴리현상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고질적인 문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은 구원받았다는 감격과 기쁨을 주고

언제라도 천국에 갈 수 있는 확신을 갖게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주님으로 믿기 때문에 자기 인생의 주관자요,

통치자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과는 그 의미가 너무 다르다.

그러한 믿음의 고백은 자신의 삶을 실질적으로 주관하고 이끌어가는 주인이

더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주님의 의미가 아닌, 구세주라는 의미로 믿고 그러한 분으로 영접할 경우

예수님의 역할은 단지 우리가 죽으면 천국 가게 해주는 구세주 이상일 수 없다는 점에서

복음의 본질로부터 크게 벗어날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분께 인생의 무릎을 영원히 꿇고 굴복한 의미에서의 주님이라는 고백이 아닌,

단지 지금 죽으면 천국에 가게 해주는 구세주라는 고백이

과연 구원받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복음의 본질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인

죄, 십자가, 부활, 회개에 구멍이 생긴 복음을 전해왔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죄가 윤리적, 도덕적 차원의 것으로 이해되었기에

십자가도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악들을 해결해주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이해에 바탕을 둔 회개는 도덕적, 윤리적 죄악들로부터 뉘우치는 선에서,

그것도 하나님께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정도에서

그쳐버리는 피상적인 수준에서 회개가 이루어지는 심각한 문제를 수반한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예수님을 도덕적, 윤리적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구원해주는 구세주로만 이해하고 믿으며 신앙을 고백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직접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자기가 주인이 된 근본 문제에 대한 해결로서 주인을 바꾸는 의미의 회개와 영접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삶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으로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비록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 속에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이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죄는 자기가 하나님과 같아지겠다고 교만해져서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상으로 범한 것이 근본적인 죄이기 때문에

그 죄로부터 회개했다면 이제는 그분을 하나님으로,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자기가 주인 되어 삶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했던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성경에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약속한 구절들이 많다.

구원을 약속한 많은 구절들 중에서 예수님을 ‘구주’

또는 ‘구세주’(Saviour)로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한 구절을 본 적이 있는가?

아무리 찾아봐도 한 군데도 없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약속한 성경 구절들은

한결같이 그분을 주님(Lord)으로 믿으라고 말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행 16:3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롬 10:9).


이제 우리는 즉각적으로 구세주에 초점을 맞춘 인스턴트 복음에서부터 돌이켜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 온전한 복음을 믿고 전하는 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장 3절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린도후서 5장 15,16절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

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 14장 7,8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주님, 제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제 자신이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살아왔던 죄를 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저의 그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습니다.

구세주이시며 주님 되시는 예수님을 제 마음과 삶 속에 영접합니다.

이제 더 이상 제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해 사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호 10:2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세계 최고의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대학교 시절 교육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는 성악에 소질이 있다는 평가를 들었고 레슨도 받고 있었으나 하고싶은 일과 안정성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전공을 살려 선생님이 되면 크게 실패하지 않고 안정적인 생활을 꾸릴 수 있지만

성악가가 되는 경우에는 성공하지 못한다면 완전히 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를 찾아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교육과 성악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좋은 결정인지 모르겠습니다.˝라며

어느 전공을 택할지 조언을 구하자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그건 너의 인생이기 때문에 네가 정할 문제다.

그렇게 중요한 결정을 내가 대신 내려줄 수는 없단다.

그러나 이거 한 가지는 꼭 말해주고 싶구나.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건 단 하나의 의자뿐이란다.

떨어져 있는 두 의자에 동시에 않으려고 하다가는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 걸.˝

 

인생에서의 선택과 책임은 오직 나의 몫입니다.

그러나 모든 선택의 결과가 다 똑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선택은 나의 행복을 좌우하지만 어떤 선택은 삶과 죽음을 좌우합니다.

성경을 통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구분하고 가장 중요한 질문에서 옳은 선택을 내리십시오.

반드시 복되고 형통할 것입니다.


주님, 눈앞의 정욕에 눈이 멀어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과 세상 중에 분명한 선택을 하십시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