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의 꿈 / 박 춘
서른 즈음의 꿈
박 춘
목에낭골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뫼뚱. 봉긋하고 둥그스럼한 뫼뚱에 비스듬히 기대고 누워 하늘을 보다 까닭 모를 눈물이 나왔던 때부터 꿈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열대여섯 살의 고민도 함께였을 것이다.
쟁골이든 자자골이든 아니 북박굴이나 물메낭골이든 상관없겠다. 바르거나 외튼 소나무. 든든한 참나무를 군데군데 산비탈에 세워두고 비스듬한 산자락을 따라 목초지를 만들어 봄부터 가을 끝자락까지 누런 황소를 놔먹이자. 골짜기 개울을 따라 삼나무 밤나무를 심겠다. 뽕나무도 심고 살구랑 보리밥나무도 심을 것이다. 이미 마을과는 한참 떨어진 산골이니 해 저물면 인적 없으리. 가을 끝나 겨울이 깊어지면 인적 더욱 끊어지고, 마을 사시는 당숙 한 분 우연인 듯 찾아와 들여다보실 것이다. 아! 작은 초가 사립 옆에 벽오동을 심어야 한다. 벽오동은 크고 커서, 내 아이 시집갈 때 쓰일 것이니 흙 좋은 자리 골라 심어야 한다.
산골이니 아침 해는 늦장지고, 해 그늘은 늑장에 쫓겨 서둘러 저물 것이니 나는 부지런해야 한다. 누렁개 한 녀석은 나를 따라 골짜기를 오르내릴 것이다. 초가 앞 작은 밭 자락에는 보리와 밀을 북풍 바람에도 기세 좋게 키우자. 겨울 까마귀 녀석들이 넘보면 누렁이와 검둥이가 왈왈 거리며 쫓아댈 것이다. 양지 녘, 엉덩이 허벅지에 똥을 바르고 옹기종기 모인 황소들의 게으른 되새김에 겨울은 깊어간다.
이윽고 봄은 오고 여기저기 새싹은 보드랍다. 한 아이는 등에 업고 한 녀석은 졸랑거리고 아내는 밭둑에서 나물을 캘 것이다. 머리에 쓴 흰 수건에 나는 까닭 없이 울컥하고 미안하다. 그래도 나는 말 하지는 않겠다. 나물 뜯으려 올라오신 마을의 아짐들은 걱정 반, 딱한 마음 반, 미움 반으로 나를 나무랄 것이다.
“어이구 참 딱하다. 딱해. 뭐 먹고 살며 뭐해서 애들은 키우고 가르칠 것이며, 부모 호강은 못 시킬망정 걱정은...”
그래 때로 나는 걱정스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할 것이다. 아내는 초저녁 호롱불이나 마구간 지붕에 내려앉은 달빛에 슬그머니 묻기도 할 것이다. 봄 햇살에 자주 빛이 된 아이의 볼을 만지며 “우리 이래도 괜찮을까?” 그럴 것이다. 나는 그런 아내에게 또 미안해질 것이다.
그런 날에 개울가의 개 버들가지를 꺾어 나무 속심을 뽑아내고 푸른 겉껍질로 버들피리를 만들어 아이에게 주겠다. 아이는 마당가에 노란 병아리를 뒤따라 다니며 뚜뚜 버들피리를 불 것이다. 검둥이는 마치 작은북 치는 소년이라도 되는 양 뒤 쫒을 것이다. 아내가 웃으면 나는 좋다. 산기슭 초지에 봄이 내려앉고 이윽고 푸르고 푸르게 자라서 여름이 온다.
아이가 조금 크면 집 앞 논배미 옆 작은 둠벙에서 개구리헤엄을 가르쳐줄 것이다. 달이 둥근 밤에는 밤낚시도 함께 하자. 둠벙에 사는 피라미 버들치라도 건져 올리면 아이는 좋아할 것이다. 나는 은근히 매운탕도 바라자. 아내는 저녁에 먹은 수제비를 남겼다가 야참으로 내올 것이니 아이와 나는 맛있게 먹어야 한다.
아내는 며칠 후 다가올 친정 나들이를 설렘 반 걱정 반으로 기다릴 것이다. 여름방학에 있는 할머니 기일은 친정가족 모임이다. 형제자매는 서울과 익산에 산다. 까맣게 탄 얼굴과 거칠어진 손. 허름한 입성에 아내는 아마 속앓이를 할 것이다. 나도 은근히 걱정이지만 꿋꿋한 채 할 것이다. 그런 나를 보고 숫기 없는 내가 안쓰러워 그는 다정한 마음이 되어 줄 것이다. 멀고도 먼 파란하늘 구름 틈새로 반달이 힐긋 거리면 아이에게는 노래를 가르치자.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 님이 쓰다버린 쪽박인가요.
꼬부랑 할머니가 물 길러 갈 때
치마끈에 달랑달랑 채워 줬으면.
......
어쩌면 아내는 산골 사는 신세가 가여울 것이다. 나는 무참해서 초가 모퉁이 토방에 앉아 궁리 할 것이다. 가을에는 아내에게 외로운 것 고마운 것 슬픈 것 안타까운 것. 사랑. 원망들로 글을 쓰게 하자. 순정한 사람이니 좋은 글을 쓸 것이다. 심성 고운 마음이 하는 원망이니 원망조차 다정할 것이다. 장작불이 흔들리는 난로 앞에서 아내는 아이에게 도란거리듯 글을 쓰면 나는 가만히 보고 있겠다.
밤나무가 커서 알밤이 빠지면 한 됫박씩 지인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먼데서 찾아온 이쁜 사람에게 밤새워 구워주기로 하자. 아이들에게도 구워주겠다. 그리고 아내가 쓴 맑고 고요해서 서럽기도 할 글을 읽으며 나는 힘을 낼 것이다.
해 저믄 석양 길에, 지는 해넘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싶다. 먼 산마루 붉게 감싸고 너머 가는 붉은 무리를 보고, 그래 저 마지막 타오르는 붉은 마음으로 살자. 세월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지라도 그렇게 살자 그리 살자. 나는 다짐도 할 것이다.
2018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