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

빈 배 虛舟

안규수 2021. 10. 11. 16:54

 

   겨울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쪼이던 날 오랜만에 뒷산에 올랐다. 겨울 산은 텅 비어 있다. 한여름에는 하늘을 보기 힘들 정도로 우거졌던 숲은 휑하다. 산새 지저귐도 들리지 않고 적막감만 감돌아 살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자연은 원래 적자생존의 원칙이 철저히 지켜지는 곳이다. 텅 빈 겨울 산도 마찬가지다. 어느 생물학자에 의하면 이런 생태는 중생대 백악기 시대에 생겨났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속씨식물인 활엽수가 생겨나면서부터라고 했다. 그전에는 소나무의 조상인 침엽수의 세상이었던지라 민둥산이 아닌 한 산은 겨울에도 푸르렀다. 하지만 활엽수가 나타나면서 숲의 풍경은 바뀌었다.

  생명의 역사에서 새로 출현하는 생명체들은 대체로 기존 생명체들의 단점을 대폭 개선해 나타난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경쟁력이라 할 수 있다. 활엽수도 마찬가지였다. 활엽수는 특히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일년내내 바늘 모양의 가느다란 잎을 달고 있던 방식을 버렸다. 그 대신 넓고 큰 잎을 선택했다.

  하지만 삶의 형태를 바꾸는 건 단순히 겉모양만 바꾼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넓은 잎은 햇빛을 받기에 좋지만, 겨울이 문제다. 추위를 더 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얼어 죽을 수도 있다. 활엽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이들의 생존방식은 자연의 순응이다. 겨울이 오면 버티기보다는 한발 물러나는, 다시 말해 잎을 다 떨어뜨리고 최소한의 신진대사로 고비를 넘긴다. 봄이 오면 새잎을 띄우고 봄바람에 흔들거리면서 활짝 웃는다. 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그 덕분에 활엽수는 숲을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 수 있었다. 위기에는 모든 걸 버리고, 비운 채 가벼운 몸으로 지내다 봄이 오면 숲은 다시 푸르름으로 채워진다.

  그릇은 무엇일까? 그릇은 곧 비움이다. 그릇은 비울수록 오묘하게도 채워진다. 채움과 비움의 미학은 비율이다. 비율은 적정선을 말한다. 비율이 안 맞으면 기울게 되어 결국 무너지게 된다. 그 비율의 균형을 지키지 못해 항상 사람들은 무너진다.

  고향 농협에서 선출직 조합장을 무려 다섯 번 당선하고 이십 년을 재임할 정도로 농민들의 신망은 두터운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정치에 뜻을 두면서 그의 인생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대형 사고에 연루되면서 그의 인생은 끝을 보고야 말았다. 그는 모든 책임을 떠안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고 집에 돌아온 후 얼마 안 돼 지병으로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작지만 건실하게 회사를 일군 친구에게 들은 말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한 번은 망하는 것도 필요하다. 망하니까 그 복잡한 인간관계가 싹 비워지더라. 그 덕에 누구를 믿어야 하고, 믿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시원하게 웃었다. 그때 비로소 세상을 사는 법을 새롭게 알았다는 듯 말이다.

장자의 빈 배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장자는 강에서 홀로 나룻배를 타고 명상에 잠기곤 했다. 그날도 장자는 여느 때처럼 눈을 감고 배 위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때 갑자기 어떤 배가 그의 배에 부딪혀 왔다. 화가 치민 장자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무례한 사람이군. 내가 눈을 감고 명상 중인데 어찌 내 배에 일부러 부딪힌단 말인가?‘

  장자는 화난 표정으로 눈을 뜨며 부딪쳐 온 배를 향해 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배는 비어 있었다. 아무도 타지 않은 배였다. 순간 장자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후에 장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그 배 안에 누군가 있기에 일어난다. 만일 그 배가 비어 있었다면 누구도 소리치지 않았을 것이고, 화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莊子外篇 20篇 山木)

  아들이 작은 개인 사업체를 천안으로 옮기는 바람에 상가 건물 3층에 50여 평의 공간을 비워 둘 수 없어 이사하기로 했다. 막상 리모델링을 끝내고 가구를 들이면서 갖고 싶고 들여놓고 싶은 것이 계속 늘어났다. 문제는 아내의 욕심이었다. 조금 넓은 거실에 이것저것 자기 마음에 맞는 물건을 사다 놓으려고 안달이었다 그럴 때마다 제동을 걸었다.

  “여백을 무시하지 말라고!”

  이 문제로 아내와 말다툼이 심했다. 결말은 언제나 그랬듯 내가 지고 만다. 그간 사 놓은 가구와 소품들로 장식을 했다. 한 점만 놓았을 때 적당한 여백도 느껴지고 조형미도 눈에 들어왔는데 여백이 없어지니 개성도 없어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진흙 묻은 사금파리처럼 물건들이 생기를 잃었다.

  또 하나, 아름다움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지 물건이 아니라는 것, 아름답다고 느끼면 아름다운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서는 색채가 깃들지 않는다. 아름답고 생기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은 비싸고 유명한 가구와 가전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미의 기준이 아닌가 싶다. 역시 공간은 채움의 문제가 아니라 비움의 문제인 것 같다.

  요즘 나이 드니 육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무엇이든 넘치면 반드시 탈이 난다. 적당히 먹고, 적당히 운동하고, 적당히 즐길 줄 아는 여유가 있는 일상이 몸에 맞는 것 같고 작은 일에 감사하면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는 일이 비움을 실천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