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

아부지, 우리 아부지

안규수 2021. 10. 11. 18:33

   아버지가 마지막 가시던 날, 형 뒤에 앉아있었다. 아버지는 종일 정신을 잃고 있다가 저녁 무렵에야 겨우 눈을 뜨셨다. 아버지가 이제 당신의 한 생애를 조용히 내려놓고 우리 곁을 떠나려 하시는구나 하는 예감이 들어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막내 있냐?”

  실오라기 같은 목소리로 날 부르는 아버지, 입을 떼는 것조차 힘들어하셨다.

  “, 아부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묵묵히 날 쳐다보는 눈빛. 그 눈빛이 전하는 말을 나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들아, 미안하다. 어린 널 두고 가기가 힘들구나.’ 소리 없는 그 말은 천둥처럼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울먹였다.

  아버지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고 아버지의 손이 힘없이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향년 65. 내 나이 열여섯, 그렇게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삶을 잘 알지 못한다. 격동의 시절에 생사를 넘나드는 무수한 질곡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엄마를 통해 귀동냥으로 들어 조금 알 뿐이다. 아버지는 큰 키에 낙천적이고 호탕한 성품을 지녀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다.

  아버지의 생업은 놋그릇을 만드는 유기장이었다. 어려서 이웃 동네 놋그릇 공장에 직공으로 들어가 기술을 배우고 서른이 넘어 독립해 작은 공장을 운영했다. 중년쯤에는 그런대로 사업에 성공해서 기와집에다 논이 20여 두락이나 되는 포실한 살림을 장만했다. 해방 이후 스테인리스 그릇이 나오는 바람에 공장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천도교(동학) 교도였다. 그 당시 순천 벌교지방에 상당한 교도들이 있었다고 한다. 어릴 때 어쩌다 새벽잠에서 깨어나 보면 아버지가 하얀 모시 적삼을 입고 마루에 단정히 앉아 주문을 외고 있었다. 아버지의 경건히 기도하는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 인상 깊게 남아있다. 아버지는 늦둥이로 얻은 막내아들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을운동회 날이었다. 그 시절의 운동회는 온 마을의 잔치 날이었다. 운동장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큰 키에 달리기를 잘해서 4백 계주 학년 대표선수로 출전했다. 그러나 바통 터치를 하다 상대 선수 발에 걸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부끄러웠다. 다시 일어나 꼴찌로 달리는데 박수 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막내, 잘한다. 달려라. .”

  아버지가 함빡 웃으시면서 손을 흔들고 응원하고 계셨다. 운동회가 끝난 후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벼 이삭이 누렇게 익은 황금 들녘 사이 신작로를 걸어 집으로 향했다. 서쪽 하늘에 저녁노을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한테 뒤지지 말어. 글고 아까처럼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 더 힘껏 달리면 돼. 우리 막내 오늘 너무 잘했다.”

  그 시절 동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곧장 동네 앞 개울 덕석 보에서 멱을 감고 소를 몰고 풀을 먹이려 산으로 갔다. 여름방학 중 어느 날, 집안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처음으로 외양간의 소를 몰고 동무들을 따라갔다. 고삐를 잡고 마을을 벗어나 들길을 걸어갈 때 큰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걷는 큰 소가 멋져 보였다. 소가 풀을 우둑우둑 뜯을 때 향긋한 풀 냄새가 너무 좋았다. 소 목줄에 걸린 풍경이 딸랑딸랑 울리는 소리도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날 산에 소를 풀어 놓고 친구들과 이 산 저 산 헤매다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소고삐를 잡고 집에 돌아오니 이미 날은 어두웠다. 마루에서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계셨다.

  이튿날, 멱을 감고 또 소를 몰고 막 나가려는 참인데 아버지께서 부르셨다.

  “어린 것이 벌써 소를 뜯기러 다녀?”

  아버지는 내가 미덥지 않은 듯 말씀하셨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은 눈치였다.

  “몸조심 허야 쓴다.”

  그렇게 소 풀 먹이는 일은 여름방학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때부터 어린 내가 할 일을 서툴지만 조금씩 찾아가기 시작했다.

  보리밭에 아지랑이가 아물아물 피어오르던 이른 봄날, 아버지는 엄마가 곱게 지어드린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십리 길인 신작로를 걸어 읍내에 가다가 어린 학생이 탄 자전거에 치여 그만 넘어지면서 도로변 벼랑으로 굴러떨어졌다. 읍내 병원에서 의사는 X레이를 촬영해 보고 환도뼈가 탈골되었으니 바로 큰 병원으로 모시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냥 집으로 가자고 하셨다. 그날 밤에 가해 학생 아버지가 집으로 찾아왔다. 이웃 동네에 사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어린애가 그런 것을 가지고 뭘 찾아왔냐고 하시면서 괜찮으니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그를 돌려보냈다. 그런 뒤 어머니와 형에게 조용히 이르셨다.

  “그 집 얘기는 입 밖에 내지 말어.”

  그 뒤 가족 누구도 그 일을 들먹이지 않았다. 나와 아홉 살 터울의 형은 열일곱에 세 살 위인 처녀에게 장가들어 당시 남매를 두고 있었다. 유독 날 사랑하고 아껴주는 하나밖에 없는 형이었다.

  아버지는 거동할 수 없어 누워만 계시니 엄마가 대소변을 받으셨다. 날이 갈수록 몸이 야위어져 갔다. 나는 형에게 아버지를 저리 두지 말고, 당장 큰 병원으로 모시자고 졸랐다. 그럴 때마다 형은 알았다고 말은 했지만 무슨 일인지 미적거리면서 움직일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러길 며칠 후, 나는 식음을 전폐하고 내 방에 드러누워 농성 중이었다.

  “아버진 나이도 있으시고, 전답 팔아 병원비 치르고 나면 우린 뭘 먹고 살거냐?

  형의 얼굴을 말없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프신 아버지를 두고 저런 말을 하는 형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집안 분위기가 한겨울의 숲처럼 고요하고 쓸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우릴 찾으셨다.

  “, 병원에 안 간다. 그리 알어.”

  모든 것을 체념하신 듯했다. 그때 광주에 있는 큰 병원은 어지간한 살림이 아니면 가기 힘들던 시절이라, 그리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을 걱정하셨던 듯하다. 인생은 잠깐 왔다 가는 것이지만 한 생애를 놓는 일이 저리 의연하실 수 있나, 그 말씀이 너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가시는 길은 통증으로 무척 힘들어하셨다. 거기에 걸을 수가 없으니 엄마가 대소변을 받아 내셨다.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 엄마가 내 방으로 오셨다.

  “어째야 쓰까~, 이 일을, 니아부지 어쩌면 쓰겄냐?”

  그리고는 땅이 꺼질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평생을 동고동락한 영감님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대책 없이 바라만 보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운 듯 안절부절못하셨다.

  “니형, 밤마동 형수하고 싸운디 속상혀 죽겄다.”

  어렴풋이 짐작은 했으나 막상 형수 속내를 알고 나니 야속해서 견딜 수 없었다. 형수 치마폭에 휘둘려 사는 형인 줄 알고 있었지만 야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속수무책으로 그냥 아버지를 보내드려야 한다니, 너무 기가 막혀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아버지가 떠나신 뒤, 생의 고비마다 당신의 음성을 들었다. 당신께서 나를 일으켜주셨고 때로는 내 손을 잡아주셨다. 아버지는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다. 이 세계는 어쩌면 죽어도 죽지 않는 아버지들의 건축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