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편지
우리가 무엇'에서' 무엇'에로' 구원을 받는가?
안규수
2022. 7. 5. 18:54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오늘도 새 날, 새 호흡, 새 힘, 새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가득한 하루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제자'를 만드는 '복음'
구원(우리가 무엇'에서' 무엇'에로' 구원을 받는가?)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구원(우리가 무엇'에서' 무엇'에로' 구원을 받는가?)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세상에서 어떻게 살지가 완전히 달라진다.
구원은 악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구원을 '커트라인 통과'로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대계명을 지키기 어렵다.
'커트라인'이 하나님을 사랑이 없고 배타적인 분으로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그렇게 보면 “왜 하나님은 더 많은 사람을 천국에 들이지 않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구원을 '커트라인 통과'로 오해하면 대명령을 이길 수밖에 없다.
구원을 '커트라인 통과'로 오해하면 대명령을 이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제자'를 삼으라는 대명령을 주셨다.
하지만 구원을 천국에들어가는 것만으로 축소시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은 불필요해진다.
구원을 그런 식으로 선포하면 수많은 사람이 굳이 변화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비극이 발생한다.
구원을 잘못 해석하면 전도를 받고 교회에 온 사람들은 낚시 광고에 속았다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구원을 잘못 해석하면 전도를 받고 교회에 온 사람들은 낚시 광고에 속았다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생각해 보라.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혹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듣고 교회에 찾아왔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교회에서 자꾸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아픈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
노인을 돌보기 위해 시간과 돈, 재물을 아낌없이 주저 없이 내놓으라고 말한다.
일부 교회들에서는 용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가르친다.
그런데 그런 가르침은 순종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하는 것이라는 치명적인 인식을 심어 줄 수 있다.
구원을 그릇되게 보면 '커트라인을 통과한 우리'와 '통과하지 못한 저들'이라는 그릇된 차별 의식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구원을 그릇되게 보면 '커트라인을 통과한 우리'와 '통과하지 못한 저들'이라는 그릇된 차별 의식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아울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변하지 못한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구원은 단순한 커트라인 통과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
그 구원은 세상의 소망이다.
그 구원은 인간 삶의 회복이며,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약속이다.
그 구원만이 과거를 죄책감 없이 직시하고 미래를 두려움 없이 직면하면서 평안하게 살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올바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신학적으로 정확해야 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올바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신학적으로 정확해야 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메시지를 선포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만들어 낼지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쇼핑몰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면 소비자들만 만들어 내게 되어 있다.
우리가 "텔레비전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면 구경꾼들만 만들어 내게 되어 있다.
우리가 "혁명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면 전사들만 만들어 내게 되어 있다.
교회가 복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천국에 가는 법이다"라고 선포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만 만들어 내게 되어 있다.
최근 '소비자 기독교'의 문제점에 관해 많은 책이 쏟아져 나왔다.
최근 '소비자 기독교'의 문제점에 관해 많은 책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 예수의 공로를 소비하라고만 외치는 복음 선포 때문에 이런 기독교 소비자들이 양산되는데,
정작 그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이 아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제자들을 만들기 마련이다. <존 오트버그, '인생, 영생이 되다' 중에서>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자다가 강도에게 공격을 당해 죽음의 위기를 겪은 스티븐 알터는 대수술 끝에 목숨은 건졌지만 심각한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다리 힘줄이 끊어져 제대로 걷지도 못했는데 이보다 두려웠던 것은 또다시 ‘누가, 갑자기’ 집에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공포감이었습니다.
퇴원 후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던 스티븐은 몸과 마음이 황폐해지는 것을 느끼던 중 문득 히말라야를 등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선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인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매일 바라봤던 히말라야였지만 단 한 번도 올라간 적은 없었습니다.
젊고 건강할 때도 올라가기 힘들었던 산이었지만 그보다 열악한 지금 히말라야를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아 결국 떠났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이었지만 스티븐은 마침내 히말라야 정상에 올랐고 정신적인 어려움도 극적으로 극복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이었지만 스티븐은 마침내 히말라야 정상에 올랐고 정신적인 어려움도 극적으로 극복했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일단 걸음을 떼면 하나님이 인도해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스티븐은
이때의 경험을 책으로도 출판해 자신과 비슷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큰 위로와 힘을 전해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한 걸음만 뗀다면 모든 것은 주님이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힘든 순간에도 믿음을 잃지 말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땅을 향해 한 발을 떼십시오. 아멘!
주님! 고난에서 나를 다시 세우실 주님만을 찬양하게 하소서.
힘들고 괴로워도 주님 앞에 나아가 참된 위로를 받읍시다. <김장환, 나침반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