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우산
정승윤
비가 온다. 비는 가는 것도 내리는 것도 아니며 나에게로 오는 것이다. 내 유폐의 방을 향하여 다가오는 것이다.
비가 나를 부르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외출할 채비를 한다. 비에 젖지 않기 위하여 챙기는 우산이지만 어쩌면 비에 젖기 위하여 챙기는 우산일 수도 있겠다.
혼자서 궂은 하늘 아래 우산을 펴는 마음이 고적하다. 이 외딴 곳에서 아무도 불러줄 이 없이 혼자 있다는 건 어쨌든 잘 못 살았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나의 실언이거나 악행이거나 부덕함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고독함에는 다분히 자초(自招)의 흔적도 묻어 있다.
우산을 편다. 멀리 자우룩이 젖어 있는 산자락이 보인다.
우산을 펴자 비로소 빗소리가 들린다. 비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선명하다. 우울하면서도 여일(如一)하다. 차가우면서도 다정하다.
우산은 나를 가린다. 우산 아래 나만의 공간이 생긴다. 세계의 적막 속에 나 하나 숨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 비의 냄새가 섞여 있다. 바람에 쏠리는 나뭇잎들이 보인다. 나는 우산 아래로 비바람에 젖어가는 세상을 구경한다. 나의 하반신도 이윽고 축축이 비에 젖어간다.
생각해보면 나의 고독이란 것도 이 우산처럼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모른다. 스스로의 존재 하나도 여무지게 단속하지 못하고 언제나 반쯤은 젖고 말지 않던가. 나의 외로움도 사실은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반쯤은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던가.
외출을 마치고 나는 내 집으로 돌아와 내 방으로 숨는다. 다시 세상의 적의로부터 내 방을 물샐 틈 없이 꼭꼭 틀어막는다.
그 후에 나는 우산을 잊는다. 신발장 한편 어디에 우두커니 서 있을 우산을.
그러나 사실은 내 의식의 한구석에 서 있는 어설픈 고독을, 그 고독에 모이던 빗소리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