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 지요?
오늘도 어제에 이어 김영봉 목사님의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가득한 멋진 하루 되시길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0^
저는 성경에서 나그네라는 단어를 만날때마다 박목월 시 "나그네"를 생각합니다.
박목월 선생은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고,
그분의 시에는 기독교적 사상이 은밀하게 그러나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나그네"라는 기독교적 인생관을 아름다운 그림 언어로 표현한 명작입니다.
성경에 시편이 모두 150편인데,
저는 이 시를 덧붙어 151편으로 만들었으면 싶습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구름에 달 가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그것처럼 신비로운 모습에 또 있을 까요?
구름과 달이 어디선가 부딪힐 것 같고 얽힐 것 같은 데,
아무 거침없이,
구름이 가는 지 달이 가는지 모르게,
흐르는 물에 배가 실려가듯, 그렇게 지나갑니다.
이 세상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래야 합니다.
이 세상에 붙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필요한 대로로 물질을 받아 사용하지만,
언제든지 놓고 떠날 수 있는 영적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나그네가 가는 길은 외줄기 길입니다.
돌아올 길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끝없이 걸아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인적이 드문 남도 삼백리 길과 같습니다.
그 길을 걷는 것이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외롭습니다.
저녁 노을이 질 때,
술익는 마을에서 잠시 머물러 쉽니다.
그렇게 머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떠날 때가 되면 다시금 구름에 달 가듯이 아무것에도 거침없이 걸어 갑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이 세상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 나그네의 자취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를 믿는다면,
다음과 같이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합니다.
"과연 그 나라에 대한 믿음이 우리에게 이 같은 여유와 자유를 만들어 주는가?"
왜 이시대에 기독교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욕심과 집착이 많고 더 세속적으로 보일까요?
하나님 나라를 아는 사람답게,
주어진 일에 신실하되 집착하지 않고,
떠날 때 떠날 줄 알고,
버릴 때 버릴 줄 아는 영적 자유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가 심각하게 잘못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보장되어있지만
우리는 많은 부분에 얽매여 있습니다
하루를 사는 것, 한 달, 일 년 그리고...
먹고 마시고 입고 누려야 하는 것들
자유를 생각하기도 전에
우리 목엔 많은 올무가 메여 있습니다
많은 헌신이나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시작과 달리 그 열정과 의욕이 사라지면
그 맡은 일은 부담감으로 작용하며
세상보다도 더 강한 올무가 되어 날 옥죄입니다
올무에서 과감히 벗어나는 방법이라면
오직 예수밖에 길이 없습니다
그 길만이 날 옥죄는 올무가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고 은혜가 됩니다
오늘 마땅히 누려야 할 나의 자유를
추스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고후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는 나이가 들어 시력이 매우 나빠졌습니다.
앞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자 의사를 찾아갔는데,
의사는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수술을 한다 해도 시력이 회복된다는 보장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차피 잃을 것은 없었기에 바하는 수술을 받겠다고 말했습니다.
수술을 마치고 며칠 뒤 눈에 두른 붕대를 푸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바하의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의사가 물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앞이 좀 보이시나요?”
“아니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온통 검은 색으로 보입니다.”
수술이 잘못되어 눈이 완전히 멀어버린 것입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슬퍼하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하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저는 어차피 시력을 잃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력을 잃은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이제 음악에만 집중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로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즐거움에 빠져 살게 하는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더욱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 필요한 선택을 하십시오.
주님! 세상살이의 즐거움보다도 주님과의 교제를 더욱 즐거워하게 하소서!
하나님께 충분히 집중하는 삶을 사십시오.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