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멈춤(pause)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 지요?
낮의 길이가 많이 길어진 듯 합니다. ^0^
낮이 긴 만큼...더 열심히 살라는 뜻이겠지요. ^0^
오늘도 아무도 걸어보지 못한 새 날을 제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당신과 멋진 하루로 만들어 가길 소망해 보는 아침입니다.
오늘은 김여호수아님의 <더 멈춤> 이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큰딸과 둘째 딸이 한창 사춘기를 보내던 때였다.
한바탕 소란을 떨고 마음이 상해서 방에 들어와 앉아 있는데 아내가 따라 들어왔다.
손에는 아이들의 어렸을 때 사진이 담긴 몇 권의 앨범을 들고서. 그리고 사진들을 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예뻤는데, 이 녀석들이 언제 저렇게 큰 거야….”
아내도 마음이 많이 상했던 것 같다.
나도 슬며시 옆에 앉아서 사진을 보기 시작했다.
예민해진 사춘기의 딸들을 보면서 잊고 살았던 옛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애들 앞에
커다란 카메라를 들이대고 셔터를 수도 없이 눌러댔던 시절이 생각났다.
애들이 한밤중에 깨서 울면 못 들은 척 버티다가 일어나 우유를 먹였다.
그러면 내 품 안에서 우유병을 물고 잠든 모습에 가슴이 터질 듯 행복했다.
그리고 연신 하품을 하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안고 있으려고 어두운 방안을 서성거렸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수많은 부모들이 겪는 그저 평범한 마음일 뿐이다.
그런데 잠시 잊고 있었다.
방에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하고, 아이들의 방으로 들어간다.
침대에 조용히 걸터 앉아본다.
그사이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아빠에게 화가 나서 잠든 척하는지 알 수 없다.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미안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사랑해….”
꽤 당당하게 마무리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순간, 내 마음은 다시 사랑으로 충만해진다.
이처럼 흘러가버린 시간은 ‘멈춤’(pause)을 통해 다시 살아난다.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되고, 사랑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 된다.
마찬가지로 멈춤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을 배우고 연습한다.
이미 우리는 한꺼번에 여러 일을 하는 데 익숙하다.
TV를 시청하면서 저녁을 먹고, 휴대폰으로는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페이스북(facebook)을 확인하고, 음식 사진을 찍어서 거기에 올리고,
그동안 가족들과 하지 못했던 깊은 대화를 시도한다.
컴퓨터 모니터에 여러 개의 창을 열어놓고 작업하듯이 살면서도 여러 창을 열어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그중에 하나님을 위한 창 하나도 열려 있다.
그러나 친밀함은 그렇게 주어지지 않는다.
친밀함을 원한다면 불편해도 다른 창들을 먼저 닫아야 한다.
멈춤은 친밀함을 거부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거룩한 선택이다.
에덴동산에서 첫 인간들이 누리던 축복을 기억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서늘해지던 저녁 시간에 그 동산에 오셔서 그들과 함께 거니셨다.
그러나 죄를 범한 후 인간은 하나님을 피해 숨는다.
죄는 언제나 친밀한 관계를 망치고, 깊은 교제를 거부하게 만든다.
죄는 투명하고 진솔하며 풍성한 관계가 아닌 그저 피상적이고 얕은 관계로 만족할 수 있다고 우리를 속인다.
멈춤은 죄의 본성을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친밀을 향해 나아가는 대담한 선택이다.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노벨문학상을 받은 알베르 카뮈는 죽은 뒤의 삶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죽음이 또 다른 삶으로 인도한다고 믿지 않는다. 죽음은 닫히면 그만인 문이 아닌가?”
죽음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죽는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인간은 심리적으로 평생 동안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아간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는 중세철학의 시작이라고 불리는 신학자 어거스틴에게도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친한 친구의 죽음을 경험한 뒤에 ‘착잡한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라고 솔직히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통해 이런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요11:4), 끝이 아닌 잠시 멈추는 것이며(요11:11),
부활의 시작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며 또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복음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구원입니다.
성경을 통해 죽음의 참된 의미와 해결방법을 찾으십시오.
주님! 복음과 구원의 진리를 더욱 확고히 믿게 하소서!
죽음 이후 천국에 갈 확신이 분명히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