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람 사는 이야기(사진)

여성 한시작가의 세계5-이매창

by 안규수 2016. 11. 13.


                         천재작가의 "비단 펼쳐지는" 듯한 글귀

 

최김지은 기자



이매창은 중종 8년(1513)에 태어나서 명종 4년(1550)에 세상을 떠난 부안의 기녀다. 성은 이, 이름은 향금, 자는 천향, 호는 계생 계랑 매창 등이다. 그녀는 천재적 작가로 가사 시조 한시 등에 두루 뛰어났고 가무와 현금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했으며 문집으로 <매창집>을 남겼다.

여기서 참고하는 작품은 <한국여성시문학전집>(허미자)과 <한국고전여성문학의 세계-한시편>(이혜순 정하영)에 수록된 것으로 <매창집>과 다른 문집들에서 찾아 낸 것이다. <한국여성시문학전집>에 수록된 <매창집>은 하버드대에 소장된 목판본으로 14자 7행 15장형식이며 숭정후 무신(1668)에 부안 개암사에서 간행한 것이다. 매창은 후손이 없어 거문고와 함께 공동묘지에 묻혔으며 그녀의 시 또한 하나 둘 사라져갔다. 이 같은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부안의 아전들이 외워서 전해지던 58수를 모아 목판에 새겼다. 함께 포함된 ‘윤공비’라는 시는 허균의 친구 이원형이 매창의 모습을 보고 지은 시다.

이 밖에도 몇 편의 시가 다른 필사본에 매창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간송박물관에도 <매창집>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김동욱 교수가 소장한 필사본도 존재한다. 이 필사본은 시인 김억의 소장본을 1942년 8월 29일에 다시 필사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필사자의 서명은 있으나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 외에도 <성소부부고>, <촌은집>, <해동시화>, <지봉유설>, <소화시평>, <증보가곡원류> 등에 그녀에 관한 자료가 전해지고 있다.

매창은 다른 여성작가들에 비해 일찍부터 관심을 받았다. 그런데 많은 연구들이 이른바 여성정감이나 기녀로서의 삶과 특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녀와 사대부 남성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시에 나타난 낭만적인 감정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관기라는 속박된 삶에 대한 그녀의 현실인식은 날카롭다. 그녀가 남긴 환상적인 시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매창은 사대부뿐만 아니라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 등 많은 남성들과 교류가 있었는데 그녀가 죽은 뒤 허균이 남긴 시를 살펴보면 그녀에 대한 당대의 평가를 짐작할 수 있다.

애계랑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룰 훔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 남아있구나.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그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아오려나.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평론가라 할 수 있는 허균은 비단을 펴듯 섬세하면서도 부드럽게 펼쳐지는 매창의 시세계를 회상한다. 그는 그녀를 복숭아를 훔쳐서 땅으로 내려온 선녀와 불사약을 훔쳐 달로 달아난 월궁항아에 비유하며 이별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설도”는 중국의 이름 난 기녀인데, 허균은 매창을 “설도”에 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비단을 펴는 듯한 그녀의 시를 열어볼 차례다.

떠나가는 님에게

나에겐 오래 된 진나라 쟁이 있어
한 번 타면 온갖 느낌 생겨난다네
세강에는 이 곡조 아는 이 없고
구령선인 생황에나 화답한다네


매창은 관기였다. 기(妓)란 원래 현악기를 다루는 여성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위의 시에 나오는 쟁 역시 열세 줄로 된 현악기를 말한다. 매창은 현악기를 다루는 데 뛰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죽을 때도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녀에게 악기는 단순한 장기나 취미가 아닌 생활 자체였을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시는 사람은 떠나가지만 악기는 여전히 그녀 앞에 남아있으므로 음악을 통해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는 내용이다. 매창의 시에는 자신을 한탄하거나 외로움을 표현한 내용이 많지만 스스로를 탓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그녀는 허균이 표현했듯 자신을 신선의 경지에 비유한다. 신선의 경지에 자신을 올려 놓음으로서, 세상이 자신의 재주와 인격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해서, 또 그런 세상과 자신이 어울리지 못한다고 해서 자존감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을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신선들의 생황에는 화답할 수 있는 것이라 여겼다. 매창의 거문고에 관한 다른 시를 살펴보자.

거문고를 타며

비바람에 울어온 지 몇 해이던가
지금은 짧은 거문고 하나 남았네
옛날의 사랑노래 타지 말아라
그 노래 끝내는 백두음 되고 말리


여기서 “백두음”은 한나라의 문인 사마상여의 아내 탁문군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시이다. 남편이 새 여인을 소실로 들이자 탁문군이 이 노래를 지어 자신의 슬픈 심경을 노래했다고 한다. 내용은 “한 마음 가진 사람을 만나 흰머리 될 때까지 서로 떠나지 말기를 바랐는데 이제 낭군께서 두 곳에 뜻을 두니 우리의 사이를 끊고자 합니다.”라고 한다.

매창은 남성들의 사랑에 관한 맹세가 곧 이별의 통보로 바뀐다는 사실을 평생토록 경험한 여성이었다. 관기는 관가에 속한 기녀로 그 관가가 다스리는 지역의 경계를 벗어날 수 없다. 반면 남성들은 부임지에 와서 관기와 인연을 맺어도 부임지가 바뀌면 자연히 떠나간다.

매창은 이러한 이별을 스스로의 기박한 운명이나 잘못으로 돌리지 않는다. “옛날의 사랑노래”라는 구절은 사랑하는 관계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수많은 환상들이 가진 허구성을 언급한다. 사실 남성들이 스스로를 여성에, 임금을 남성에 비유하고 있는 여성화자 가사들을 보면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에 있어 스스로를 탓하는 내용이 많다. 이 때문에 고전문학 속 이별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고정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실재하는 많은 여성들의 작품을 보면 그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관용적 이미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전문학 속 여성들, 특히 기녀 문학을 바라보는 데 대한 두 번째 오해는 세상의 모든 풍파에 초연하여 도량이 넓고 당당한, 따라서 어떠한 일에도 상처 받지 않는 통 큰 여성의 이미지로만 파악하는 것이다. 매창의 시를 몇 수 더 살펴보자.

병을 앓으며

내 병은 봄을 앓음 아니오
단지 님을 그린 탓이라네
잡다한 세상살이 어려움 많아
외로운 내게로 돌아오지 않는다네

어쩌다 그릇되어 헛소문에 올라
뭇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네
부질없이 근심과 한 맺혀 있어서
병이 되어 사립문 닫아 걸었네


자신이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고 파악하는 매창의 환상적인 사고는 세상과 조우할 수 없는 그녀가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꿈꾸는 자의 환상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주고 때로는 전복을 꿈꿀 수 있는 틈새를 열어준다. 그러나 현실의 모순 앞에서는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님은 “잡다한 세상살이”에 “어려움 많아” 오지 않는데 “외로운” 나는 “헛소문” 때문에 “뭇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다.

소문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구나 관기의 신분인 한 여성에게 그것이 헛소문이라도 스스로를 항변할 수 있는 수단은 시 혹은 문학밖에 없었다. 뛰어난 재주를 지녀 스스로를 신선에 견주는 여성이지만 세상의 폭력에는 “사립문”을 “닫아”건다. 이는 세상과의 절연이나 폐쇄성이 아니라 상처받은 영혼의 자기 방어로 봐야 할 것이다.

다음은 매창의 가장 유명한 시들 가운데 한 수다. 매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시이기도 하다.

술 취한 나그네에게

취한 손 비단 적삼 부여잡으니
비단 적삼 그 손길에 찢어지네
그까짓 비단 적삼 아깝잖지만
사랑의 정 끊어질까 두려울 뿐


이 시는 매창의 대범하고 호기 어린 성격을 드러내는 시로 자주 파악된다. 그러나 관기는 관가에 속한 존재로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삶을 산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화자는 “취한 손”으로 “비단 적삼”을 찢는 “나그네”를 진정시키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다. 관기를 상대하는 남성들의 신분은 고급 관리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 시의 “나그네” 역시 신분이 높은 남자일 것이다. 이미 자신이 세상과 완벽히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한편으로는 초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한 그녀지만 “비단 적삼”이 찢어지는 상황은 여전히 두렵고 무서울 것이다. 그녀에게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지만 그 공포가 무뎌지는 것은 아니다. “비단 적삼 아깝잖지만 사랑의 정 끊어질까 두려울 뿐”이라는 구절을 매창의 의연한 호기로만 파악하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절절한 두려움을 읽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