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68 거울/정승윤 거울/정승윤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 속에 또다른 내가 있다. 그와 나는 쌍생아처럼 웃는다. 이마를 맞대면 샴쌍둥이 같다. 거울 속 세상은 이곳 세상과 너무 닮아 있다.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다. 화병에 꽃이 있었던 기억도 함께 한다. 그 언저리에 허무도 함께 있다. 그와 나의 거리는 백짓장처럼 얇다. 금방이라도 찢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문지방만 건너면 갈 수 있는 저승길 같다. 때로는 거울 속 세상은 고요하고 아름답다. 거울 앞에서 나는 죽음을 묵상한다. 그 세계로 조용히 옮겨 가고 싶다. 삶과 죽음은 너와 나처럼 언제나 함께 했지만 한 몸은 아니었다. 그러나 삶이 사라지면 죽음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이래도 우리는 죽음 이후를 모른다고 할 것인가. 2023. 12. 9. 세상의 절반/진은영 세상의 절반/진은영 세상의 절반은 붉은 모래 나머지는 물 세상의 절반은 사랑 나머지는 슬픔 붉은 물이 스민다 모래 속으로, 너의 속으로 세상의 절반은 삶 나머지는 노래 세상의 절반은 죽은 은빛 갈대 나머지는 웃자라는 은빛 갈대 세상의 절반은 노래 나머지는 안 들리는 노래 2023. 12. 9. 인연 인연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의 의한 의견 • 21시간 인연 맨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지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한 그 순간 나는 키가 작아 앞줄에 앉고 너는 키다리. 맨 뒷줄이 네 자리 아, 우리가 어떻게 단짝이 됐을까! 키다리 친구들과 둘러서서 바람이 가만가만 만지는 포플러나무 가지처럼 두리번거리다 나를 보고 너는 싱긋 웃으며 손짓한다 너를 보면 내 코는 절로 벌름벌름 내 입은 벙글벙글. -황인숙(1958~) 마지막 두 행이 멋지다. “내 코는 절로 벌름벌름/내 입은 벙글벙글”이라는 표현이 재미있어,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진짜 친구를 보면 말보다 먼저 몸이 반응한다. 친한 사람들은 멀리서도 서로 알아볼 수 있다. 중학교 동창, 오랜 벗들을 만날 때.. 2023. 12. 5. 단오 단오 곽재구 사랑하는 이여 강가로 나와요 작은 나뭇배가 사공도 없이 저 혼자 아침 햇살을 맞는 곳 지난밤 가장 아름다운 별들이 눈동자를 빛내던 신비한 여울목을 찾아 헤매었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곳으로 와요 그곳에서 당신의 머리를 감겨드리곘어요 햇창포 꽃잎을 풀고 매화향 깊게 스민 촘촘한 참빗으로 당신의 머리칼을 소복소복 빗겨드리겠어요 그런 다음 노란 원추리꽃 한 송이를 당신의 검은 머리칼 사이에 꽂아드리지요 사랑하는 이여 강가로 나와요 작은 나룻배가 은빛 물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곳 그곳에서 당신의 머리를 감겨드리겠어요 그곳에서 당신의 머리칼을 빗겨드리겠어요 / 단오, 곽재구 2022. 11. 22. 이전 1 2 3 4 ··· 1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