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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수필

나무 / 정승윤

by 안규수 2017. 2. 8.


   집을 짓는다면 꼭 나무로 짓고 싶다. 기둥은 느티나무나 팽나무나 굴참나무를 모양 그대로 세워 그윽한 숲이 되게 하고 싶다. 도리 기둥과 서까래는 잘 자란 소나무를 써서 그 끝에 풍경 하나를 달고 싶다. 대청마루는 오동나무로 깔아 항상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아두고 그 귀퉁이에 역시 오동나무로 짠 잘 생긴 반다지 한 채 두고 싶다. 이도저도 힘들면 튼실한 통나무로 네 귀를 맞추고 바람벽은 흙으로 바르고 서까래는 아무 생나무나 엮어서 지붕으로 덮은 볏짚 위로 청솔가지 한 가지 비죽이 비져 나오는 그런 집을 짓고 싶다.

   봄 산은 신비하다. 아직 계곡물은 얼음처럼 차가운데도 벌써 나무에는 봄의 기운이 감돈다. 아직 우리의 발바닥은 동토를 밟고 있는데도 나무의 뿌리는 봄의 기운에 닿아 있다. 아직 우리가 찬바람에 옷깃을 여밀 때 벌써 나무의 머리는 봄 하늘에 뻗어 있다. 우리가 걷는 동안에도 봄은 순식간에 다가온다. 잎의 새순과 꽃의 봉오리가 숨가쁘게 다툰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더운 훈김이 흐른다. 멀리서 보면 봄 산은 온통 파스텔 색조다. 연두빛은 잎의 색조고 분홍빛은 꽃의 기운이다. 뚜렷한 형상도 없이 빛은 흐르고 색은 번진다. 봄새들의 날개도 새치름하게 윤기가 흐른다.

  뒷산에 산벚나무 한 그루 있다. 녹음이 짙을 때나 겨울산에서는 그 산벚나무를 찾아내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벚나무 꽃이 필 때면 온 산이 그 나무로 인해 환해져 보인다. 칙칙한 상록수림 위로 그 환한 벚나무의 이마가 보일 때면 산 아래서부터 벌써 기대감으로 숨이 가쁘다. 벚꽃은 낱낱이 보면 소박하기 그지없는 꽃이다. 색도 희박하고 꽃술도 가늘다. 그러나 함께 모여 핀 벚꽃은 구름보다 호사롭다. 구름이 잠시 머무르지 않듯이 벚꽃도 그 절정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피면서 져 내리고 지면서 피어난다. 그 무상한 아름다움에 절로 숨이 멎는다. 만개한 기쁨과 낙화의 설움이 함께 서린다. 그래서 피어도 슬프고 져도 기쁘다. 봄은 너무나 짧고 바람은 쉬임없이 분다. 이 꿈 같은 봄날, 꽃그늘 아래서 생전에 이 꿈을 다시 꾸지 못할 일을 걱정한다.

  장자의 나무는 쓸모가 없다. 너무 구부러져 자로 잴 수도 없고 너무 뒤틀려 먹줄을 튕길 수도 없다. 이렇게 쓸모가 없어서 오래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쓸모가 없다는 것이 그 나무의 본질이 아니다. 쓸모없는 나무들이 오히려 쉽게 베인다. 땔감이나 서까래로 쉬이 쓰인다. 장자의 나무는 그 쓸모를 넘어 서 있다. 쓸모를 넘어선 아름다움에 있다. 바람의 형상을 간직한 나무는 아름답다. 바람 부는 대로 휘어져 있는 나무의 형상은 아름답다. 세월의 무게에 휘늘어진 가지는 아름답다. 지심地心을 연모해 옆으로 번져 나가는 가지는 아름답다. 수면 위로 늘어져 스스로 비쳐보는 나무는 아름답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이 나무를 키웠을 것이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을 장자는 쓸모없음不用이라 부르지 않고 큰 쓰임 大用이라 불렀다.

  나무는 한 번 뿌리를 내리면 평생 그 자리를 지킨다. 우리가 숱하게 나서죽고 만났다 흩어지는 동안에도 나무는 의연하게 그 자리를 지킨다. 나무는 욕망을 위하여 뛰지도 도약하지도 않는다. 나무는 제자리를 불평하거나 자신의 운명을 염려하지 않는다. 나무의 위대한 점은 스스로 자족한다는 점이다. 나무에게는 일광도 반짝이는 기쁨이요, 바람도 일렁이는 기쁨이다. 비도 기쁨으로 맞고 눈도 기쁨으로 품는다. 나무는 스스로 존재하며 스스로 풍경을 이룬다. 모든 풍경에는 나무가 있고 나무가 있어야만 그 풍경에는 의미가 생긴다. 여름 하늘에 나무가 있어야만 구름이 이는 것을 알고 밤하늘엔 나무가 있어야만 별이 열리는 것을 깨닫는다. 황막한 지평선 위에 한 그루 나무가 없다면 그 무엇으로 지는 해를 묵상할 것인가. 언덕 위에 고목이 있고 그 고목 위에 검은 구름이 있고 그 구름은 붉은 달을 반 쯤 가리고 있다. 그 고목은 모든 것을 거느리고 있다. 그 고목은 그 풍경의 중심에 있다.

  나무는 완벽한 조화이며 균제이며 통합이다. 나무는 줄기와 잎은 지상에 두고 있고 뿌리는 지하에 두고 있다. 한 쪽은 완전히 드러내고 한 쪽은 완전히 감추고 있다. 지하의 나무가 잠들 때 지상의 나무는 꿈을 꾼다. 지상의 나무가 빛과 소리의 세계를 구가할 때 지하의 나무는 어둠과 침묵의 세계를 명상한다. 아름다운 공존이다. 나무는 서로 위와 아래를 타투거나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는 이 세계는 거꾸로 선 나무라 하였다. 그 세계는 줄기가 뿌리가 되고 뿌리가 줄기가 되는 세계이다. 우리의 지혜는 지상의 나무를 보고 그 뿌리를 짐작하는데서 비롯되었다. 나무 밑에서 우리는 삶이 곧 죽음으로 이어지며 그 죽음에서 다시 삶이 생겨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이 없으면 죽음이 없고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우리 인간은 꽃이 지고 잎이 질 때 그것이 뿌리로의 귀환임을 알면서도 못내 지상의 삶에 연연하여 눈물짓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 정승윤 도편산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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