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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편지

나의 데스티니 찾기(2)

by 안규수 2018. 10. 5.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52년간 남편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역을 하신 선교사님께서 한평생 불평을 하지 않으며 사셨다고 하는데요,
그분의 유품인 수첩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1. 날씨로 시작되는 하루의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겠다.  
2. 더 좋은 환경이나 다른 장소에 있는 나의 모습을 그리지 않겠다.
3. 나의 몫을 남의 것과 비교하지 않겠다. 그리고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이라고도 인생을 가정하지 않겠다.
4. ‘내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내게 속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겠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경 가운데서
나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는 그 분의 사랑을 바라보며
늘 기쁨과 감사와 평강이 가득한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 아침은 고성준목사님의 <나의 데스티니 찾기>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아벨은 성경 인물 중 그 데스티니를 가늠하기가 가장 어려운 인물이다. 
데스티니를 엿볼 만한 인생의 특별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창세기 4장에 아담과 하와의 아들로 짧게 등장하고는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인생이 끝난다.

과연 아벨의 데스티니는 무엇이었을까? 
아벨에게도 데스티니라는 것이 있었을까? 
성경에 달랑 몇 구절 나오는 이 인물.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젊은 나이로 요절한 이 사람. 
이 사람의 데스티니가 무엇이었을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아벨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데스티니를 가늠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대면하기조차 고통스러운 현실들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엄마 뱃속에서 세상을 보지도 못하고 떠나는 유산된 아이들, 
태어나자마자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어린 영혼들, 
장애아로 태어나 집안에서만 평생을 보내다가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 
이들의 데스티니는 도대체 무엇일까?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아주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들의 데스티니는 도대체 무엇일까? 
인생이 펼쳐지기도 전에 끝나버린 사람들, 정상적인 삶을 살기 어려운 장애인들, 
이들의 데스티니는 도대체 무엇일까? 
아벨은 이런 사람들의 미스테리한 데스티니를 대변하고 있다.

“나의 데스티니가 무엇이냐고요? 

나의 데스티니는, 
인간의 데스티니가 꼭 무언가를 성취하고 이루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존귀한, 존재적인 데스티니가 있습니다.” 

아벨이 말해주는 데스티니는 개인이 혼자 이루어가는 개인적인 삶의 목표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이루어가는 공동의 목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이지, 한 사람의 성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개인만을 놓고 볼 때 아벨의 삶은 실패하고 의미 없는 인생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아벨은 그의 짧은 삶을 통해 그가 속한 인류 공동체에게 죄의 무서움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증언했다. 
죄로부터 돌아서야 하는 ‘인류 공동체의 데스티니’를 일깨운 것이다.

데스티니를 그저 개인의 ‘운명’으로만 제한하면 아벨의 데스티니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궁극적인 데스티니는 공동체 속에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지, 
내 인생에 무엇인가를 이루는 것만이 아니다.

이 관점으로 바라보면 장애인들이나 육체적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의 소중한 데스티니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들은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제공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 사랑하라”라는 하나님나라의 데스티니를 ‘함께’ 이루어가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주는 사람뿐 아니라 사랑을 받는 사람도 필요하지 않은가? 
그렇다. 공동체 속에서 이들의 역할은 “사랑받는 것”이다. 
누군가를 통해 이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 돌려받을 가능성이 없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다면 그때 세상은 하나님을 보게 된다!

주하는 1급 뇌병변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뇌에 심각한 손상을 안고 태어난 주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정상적인 행동이 어려웠다. 
말을 하는 것도, 서서 걷는 것도 불가능했다. 
다섯 살이 되었지만, 지금도 유모차를 타고 다니는 주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엄마를 향해 활짝 웃는 것뿐이다. 
가족들은 주하를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다. 재정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처음에는 교회 공동체 전체가 이 아이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다. 
셀 리더로 섬기고 있던 주하의 엄마는 주하를 돌보기 위해 모든 교회 사역을 내려놓아야 했다. 
24시간 엄마의 손을 필요로 하는 주하라는 존재는 엄마의 삶 자체를 지워버린 듯 했다.

눈물과 고통의 시간이 흘렀다. 
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중요한, 정말 중요한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주하가 세상 그 누구보다도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주하는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랑’을 요구하는 존재다. 
주하에게 쏟아 부어진 사랑, 그 시간과 희생은 아무런 보상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사랑하느냐고? 그것이 주하의 데스티니니까!

그렇다. 주하의 데스티니는 “사랑받는 것”이다. 아무 조건 없이 사랑받는 것이다. 
그런 주하가 존재하기에, “사랑을 주어야 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데스티니가 이루어진다.

감사하게도 주하의 가족들은 성숙하게 자신들의 데스티니를 찾아갔다! 
나는 주하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 눈빛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즉시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랑받아야 하는 주하의 데스티니는 
사랑을 주는 그의 가족들의 데스티니와 합쳐져 완전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간다!


모든 사랑이 가치 있지만, 그중에서도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랑’은 우리에게 특별한 감동을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완전해야 할 세상에 불완전해 보이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함께’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다. 
장애인들도, 어린 나이에 질병이나 사고로 죽음을 맞은 아이들도, 
주변의 누군가와 함께한다면 하나님을 나타내는 놀라운 데스티니를 이룰 수 있다.

그래서 데스티니는 공동체적이다. 
사랑받는 것만이 가능한 사람이 있다 해도, 그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함께 있다면, 
그 공동체는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낼 것이다. 
기억하라. 
당신의 데스티니는 당신 주위의 사람들과 얽혀서 함께 이루어가는 
‘우리’의 데스티니지, 나만의 데스티니가 아니다.

나의 데스티니 찾기.고성준 / 규장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일서 4장 11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히브리서10장 24절-2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마가복음 10장 45절

하나님, 데스티니 하면 내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속에서 함께 이루어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속한 모든 곳곳에서 사랑을 주고, 또 받으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리게 하소서. 
하나님의 계획을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함께 섬기며 이루어나가게 하소서.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행 14: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아프리카에서 남편과 함께 52년이나 선교를 한 엘라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타는 듯한 무더위와 불편한 환경 속에서도 그녀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불편한 생활이나 상황에 대해서 한 마디도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엘라의 딸 미미는 어머님이 불평을 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하늘나라로 떠난 뒤에 유품에서 발견된 한 수첩에 다음과 같이 적혀진 세 가지 좌우명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날씨로 시작되는 하루의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겠다.  
●둘째, 더 좋은 환경이나 다른 장소에 있는 나의 모습을 그리지 않겠다.
●셋째, 나의 몫을 남의 것과 비교하지 않겠다. 그리고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이라고도 인생을 가정하지 않겠다.
●넷째, ‘내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내게 속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겠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환경과 인생을 바라던 것이 평생 불평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삶에 불평하고 있다면 그런 마음마저도 하나님께 내려 놓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님! 불평대신 주님의 뜻이 있음을 깨닫고 순응하며 살게 하소서.
주어진 환경 속에서도 주님께 감사할 제목들을 찾아냅시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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