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화창한 날씨다. 때 이른 장마로 모든 것이 녹녹한 일상에서 여름의 햇살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하릴없이 빈둥대든 우린 오랜만에 극장에 가기로 했다. 소녀처럼 좋아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가볍고 즐거웠다.
영화 ‘풍산개’는 ‘봄여름가을겨울’ 등 인디영화계의 거장 김기덕 감독이 각본을 쓰고 그의 수제자 전재홍 감독이 메가폰을 든 작품이다. 전 감독은 후쿠오카 아시아영화제에서 ‘아름답다’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후 이 영화가 두 번째 영화이다.
평양에서 서울까지, 망명인의 부탁으로 휴전선을 넘나들며 모든 것을 배달해주는 이름 없는 남자, 풍산개. 그가 이번에 배달해야하는 것은 바로 북한 고위층 간부였던 망명인의 사랑하는 여인 인옥이다. 3시간 안에 그녀를 평양에서 서울로 데리고 와야 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그 짧은 3시간동안 두 사람 사이에 운명 같은 느낌이 서로에게 전해지고 서울에 발을 딛게 된 그 순간, 망명인과 인옥, 그리고 정체불명의 남자 풍산개 세 사람에게는 삼각관계의 복잡 미묘한 감정이 오고간다.
3년간의 침묵을 깨고 각본을 쓴 김기덕 감독의 작품으로 이 영화는 시작부터 이슈가 되었다. 칸 영화제에서 ‘아리랑’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 김기덕 감독, ‘칸이 나를 깨웠고 <풍산개>가 나를 일으켰다’라고 했다. 지금까지의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은 사회적인 해석이 많이 담겨 있었다. 이 영화 역시 분명 그럴 것이라 선입견이 있었다. 예를 들면 풍산개의 이미지에서 풍기는 분단의 아픔이라던가, 여성비하(그의 영화에서 창녀가 자주 등장했다) 등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고정관념들을 영화 속에 고스란히 묻어두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사회적인 개념보다도 더 큰 것이 존재했다. 바로 사랑이라는 키워드였다. 파격적이고 새로운 스타일의 이야기 속에 담겨있던 운명적인 사랑은 이 영화를 보는 121분 내내 두 손을 꽉 쥐게 만들었다. 영화 끝부분에 가서 남북의 정보요원들이 서로 총을 겨누며 블랙코미디적인 면모를 보인 장면은 확실히 김기덕 감독답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극중 인옥의 죽음과 정체불명의 남자 풍산개의 분노는 가슴 뭉클한 압권이었다.
배우와 사랑, 이 영화의 두 가지 키워드이다. 우선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배우의 힘이다. 솔직히 3시간 안에 사랑에 빠지고 운명이라 믿는 스토리는 자칫 잘못하면 앞뒤가 맞지 않은 말도 안되는 사랑영화가 되기 쉽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김규리(인옥)라는 배우의 청순한 매력은 대단했다. 이 영화에서 북한말을 쓰는 인옥의 모습에서는 대중적인 모습이, 정체모를 남자에게 운명처럼 끌려가는 여자의 모습에서는 숙명을 안은 한 여인의 애절한 사랑이 그려진다.
그리고 윤계상, 이 영화는 윤계상을 배우로서 재발견하게 된다. 그의 깊이 있는 연기는 일품이었다. 그는 이 영화 속에서 대사가 한마디도 없다. 하지만 그의 말초적인 이미지는 인물 속에 모든 감정이 이입되어 있다. 죽은 인옥을 발견하고 모든 것을 잃어 버린 듯 허탈해 하는 장면, 고문을 당하며 인옥의 죽음을 듣는 순간 성난 사자처럼 울부짖는 그의 모습은 관객들을 자신의 심장으로 흡입하고 만다. 그때 극중에서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그의 목소리는 처절했다. 매순간 고통 받는 장면에서 냉정하면서도 이지적인 그의 이미지는 활화산처럼 분출한다. 이 영화 속의 주인공이 윤계상이었기에 이 운명적인 사랑이 이해가 될 정도이다. 이 영화에서 두 배우는 출연료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순수한 열정이 영화속에 잔잔히 녹아 있다.
두 번째 키워드는 사랑이다. 평양여인 인옥과 배달인 윤계상이 함께 남쪽으로 내려오는 시간은 1시간 반 정도다. 이 짧은 시간에 큐피트의 화살은 시위를 떠난다. 휴전선 부근 물속을 통과 할 때 두 사람은 벌거벗는다. 단단한 근육질의 계상과 터질듯 성숙한 인옥의 몸매가 잠간 스쳐 지나가지만 이 영화에 나타난 사랑은 통속적인 것을 뛰어 넘는다. 지극히 운명적인 사랑으로 승화되는 과정이 아름답게 처리되어 있다.
이 영화의 절정은 혹독한 고문으로 피 범벅이 된 얼굴을 맞대고 벌어진 두 사람의 열정적인 키스다. 그것은 단순한 남녀의 키스가 아니었다. 그들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육과 혼을 아낌없이 던져 버린다. 순간 옆자리의 아내를 힐끔 봤더니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물속을 건 낼 때 인옥이 잠시 질식해서 윤계상이 인공호흡으로 살려낸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인옥이 평양사투리로 “키습네까?, 인공호흡네까?”라고 묻는다.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그녀의 간절한 눈빛은 처절했다. 이미 두 사람은 죽음을 예견하고 있어서였다. 마침내 인옥은 북한 공작원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다. 풍산개, 그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3.8선 철책을 넘다 장열이 산화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처음부터 분단국가의 현실 등 어려운 사회적 관념과 개념은 모두 버리고 두 사람의 사랑에 집중해서 관람해야 제 맛이 날 것 같은 영화이다. 스크린이 어두워지고 극장을 거의 매운 관객들이 웅성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우린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른다. 가슴을 가득 채운 스크린의 여운이 우릴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도 젖어 있었다. 모처럼 보는 아내의 생소한 소녀 적 모습이다. 우린손을 잡고 오랫동안 강둑을 말없이 걸었다. 아내의 희끗 희끗한 머리칼에 저녁노을이 내려앉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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