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주말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오늘도 새 날, 새 하늘, 새 호흡, 새 힘, 새 노래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0^
성도가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로 인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위치의 변화요,
심판의 대상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의 변화요,
사랑하는 아버지가 계신 천국을 향하여 발걸음이 전환되는 방향의 변화요,
그 천국문까지 올바로 달려가고자 모든 짐을 내려놓는 가치 기준의 변화요,
그 여정 가운데 더욱 사랑하게 되는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모습의 변화요,
그 변화된 모습에서 영향력이 흘러나와 세상을 살리는 역할의 변화요,
그리고 결국 아무런 공로 없는 죄인이
언젠가 지존하신 그분의 품에 안기게 되는 운명의 역전이다.
이것이 성도의 영광이다!
그렇다!
진정 구원받은 성도라면 반드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는 형태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고
스스로 속이는 거짓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오늘의 나눔 본문 중에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 아침은 다니엘김 선교사님의 <가야할 길> 이라는 제목의 글을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가 시작될 때 나는 고민했다.
‘이 기간을 나는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
세상은 혼란에 빠지고, 사회는 리듬이 깨지며,
사람들의 일상은 위축되어도 나는 주어진 이 시간을 주님 앞에서 바로 살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세계를 다니던 날개를 접고 모든 강단 사역을 일시 중단한 채
잠잠함 가운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냈다.
겨울이 서서히 그 모습을 감추고 다가오는 봄에 그 자리를 양보할 무렵,
나는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아브라함의 인생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의 삶을 통해 전해지는 메시지는 우렁찼다.
“가야 하는 길이 있다!”는 외침이었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가야 하는 길이 있다.
그 길의 목적지는 우리의 본향이다.
살아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
거룩하신 통치자의 왕국이다.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모든 이들에게 허락되는 영원한 유업이다.
이 길은 하늘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여정이다(요 6:44).
이 길은 가고 싶다고 가는 길이 아니요,
가기 싫다고 포기할 수 있는 길도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롬 8:28) 자라면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다.
성도(聖徒)란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을 칭하는 표현이다.
참된 성도는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의 발걸음은 반드시 언제나 천성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 자신을 엄중하고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날카로운 잣대가 아닌가 싶다.
우리의 발걸음이 천성,
즉 우리의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가치 기준에 변화가 도래한다는 뜻이다.
목적지는 방향성을 좌우하고, 방향성은 가치 기준을 새롭게 형성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필수적이며, 회피 불가하다.
예를 들어, 우리 인생의 목적이 이 땅에서의 행복과 성공이 아니라
주님 나라에 입성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썩어 없어질 세상에 더 이상 보화를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거주할 곳에 투자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합리적인 선택이 되지 않겠는가?
사복음서에서 주님이 천국과 지옥에 대해 가르치시는 것보다
물질관에 대해 교훈하신 적이 더 많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개인의 신앙과 물질관은 떼려고 해도 절대로 뗄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물질관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거의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발걸음이 초래하는 가치 기준의 변화는 물질관의 변화만이 아니다.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땅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보이는 고향집을 향하여 나아가는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남겨진 시간을 계수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그리워서 꿈에도 아른거리는 집에 가려는 사람이라면 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지 않겠는가?
천국을 향한 이런 애절함이 없는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잠시 지나가는 경유지인 이 땅을 마치 목적지라고 착각하고
안주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어찌 ‘성도’라는 거룩한 이름에 어울릴 수 있겠는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하늘을 사모하였지만, 동시에 이 땅에서 신중하게 살았다.
그들은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 시 90:12
이것이 성도의 지혜다.
유한한 것을 영원하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슬기로운 태도라 칭찬할 수 있을 것이다.
잘 떠나기 위해 준비한 사람은 남은 시간을 잘 살아낼 수 있는 법이다.
마지막 날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영광스러운 죽음뿐만 아니라 풍성한 삶도 일구어낼 수 있는 법이다.
이것이 성도의 발자취라 할 수 있다.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변화는 물질관과 시간 개념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지만,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변화를 성도는 경험하게 되어 있다.
그 모든 변화는 풍성한 생명을 향한 변화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풍성한 생명을 약속하지 않으셨는가?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요 10:10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로운 생명은 단면적이지 않다.
우리가 얻은 구원의 영향력은 풍성하다.
언젠가 죽은 다음에 천국 간다는 단순한 개념이 절대 아니다.
성도가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로 인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위치의 변화요,
심판의 대상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의 변화요,
사랑하는 아버지가 계신 천국을 향하여 발걸음이 전환되는 방향의 변화요,
그 천국문까지 올바로 달려가고자 모든 짐을 내려놓는 가치 기준의 변화요,
그 여정 가운데 더욱 사랑하게 되는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모습의 변화요,
그 변화된 모습에서 영향력이 흘러나와 세상을 살리는 역할의 변화요,
그리고 결국 아무런 공로 없는 죄인이 언젠가 지존하신 그분의 품에 안기게 되는 운명의 역전이다.
이것이 성도의 영광이다!
그렇다! 진정 구원받은 성도라면 반드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는 형태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고 스스로 속이는 거짓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여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이러한 변화와 성장을,
우리는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목격할 수 있다.
가야 하는 길을 가는 성도들의 신앙의 모험에 대하여
섬세히 소개하고 있는 그의 발자취를 함께 살펴보기 원한다.
믿음의 경주를 달려낸 실상을 통하여
우리의 추상적이고 비본질적인 신앙생활에서 돌아서게 되기를 바란다.
-가야 하는 길, 다니엘 김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 고린도후서 13장 5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에베소서 5장 15-17절
하나님, 우리가 가야 할 최종 목적지 본향!! 그곳을 사모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도가 되게 하소서. 그저 교회 다닌다고 성도가 아님을 알기에 진정한 주의 자녀 되게 하소서.
세상 사람과 별반 차이 없이 살아가며 속이는 자가 아니라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통해 진정한 주의 자녀, 성도가 되게 하소서.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밀라노의 한 백작의 요청으로 다빈치가 그리기 시작한 ‘최후의 만찬’은 완성되기까지 무려 3년이나 걸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후의 만찬’을 다빈치가 처음 그린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최후의 만찬은 다빈치 이전에도 당대의 유명한 화가라면 한 번씩 그렸던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작품들과 다빈치의 작품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로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의 모든 초점을 예수님께 맞췄다는 점입니다.
다빈치 이전의 최후의 만찬은 유다의 배신에 초점이 맞춰져 그림을 보기만 해도 유다에게 먼저 눈이 갔습니다.
하지만 다빈치는 철저한 원근법으로 예수님에게 먼저 시선이 가도록 그림을 그렸고,
예수님을 향한 시선이 방해받지 않도록 손에 들고 있던 컵도 수정단계에서 지웠습니다.
또한 유다의 얼굴로 적합한 상대를 찾기 위해 몇 달 동안 빈민가를 뒤졌고
예수님의 얼굴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만 2년 가까이 고뇌했습니다.
죄인인 유다보다도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더욱 세밀하게 표현했기에 다빈치의 작품은 진정한 명화로 남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과 고난과 부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잊지 말고
나의 모든 삶 가운데 온전히 예수님만 드러내기를 바라고 소원하십시오. 아멘!!
주님! 내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게 하소서.
예수님을 전하고, 닮아가는 목표를 잊지 맙시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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