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오늘도 새 날, 새 하늘, 새 호흡, 새 힘, 새 노래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멋진 하루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이봐, 크레이그, 넌 하나님이 지금도 기적들을 일으키신다고 믿니?”
“물론이지”라고 나는 대답했다.
“다행이네. 네 기도들은 다 시시해서 말이야.”
나는 그와 함께 웃고 싶었지만, 내 친구의 농담이 아프게 들렸다.
무엇보다 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내가 목회 사역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함께 기도회를 마치고 나왔다.
내 친구는 나를 잘 알았기에 그렇게 놀린 거였으나,
나는 또한 그가 제대로 지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문이 막힌 채, 나는 그의 말에 담긴 진실을 생각하며 어떠한 방어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비밀을 그가 말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내 기도들이 무기력하다는 사실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한 내 친구의 일침은 이제 나의 기도 생활에 변화가 필요한 때임을 깨우쳐주었다.
너무 오랫동안 나는 활기 없고, 믿음 없고, 주로 공허한 기도들을 참아 왔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 많은 걸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고,
비록 그것이 나에게 요구할 것들에 대해 망설임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더 친밀히 알고 싶었다.
그렇게 되기 위해, 나의 영적인 짐의 일부를 풀어놓는 것부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나는 나의 미적지근한 기도 생활에 대해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심지어 나는 목사였다.
당신의 기도 생활에 대해 불안함을 느낀 적이 있다면, 목사인 내가 어떠했을지 생각해보라.
나는 기도의 전사가 되어야 한다.
뜨겁고 굽힐 줄 모르는 믿음과 성령의 인도를 받는 억누를 수 없는 능력으로 가득한 전사여야 한다.
하지만 나는 기도하려고 애쓰면서 표류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조용히 기도하든 소리 내어 기도하든, 기도하는 도중에 내 마음은 여기서 저기로 방방 뛰어다녔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암에 걸린 제 친구를 치료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지금 그녀의 삶에서 역사하소서….
나 정말 그녀를 보러 병원에 다시 가봐야 하는데.
아, 맞다, 자동차 오일을 교체하지 않았잖아.
시리얼도 떨어졌는데. 아이들이 난리를 치겠군.
에이미는 오늘 병원 예약이 있는데, 가만, 지난달 의료보험료를 냈나?
올해 보험료가 얼마나 오르는 거야!
아, 맞아, 이번 주 설교. 좀 강력한 예화를 찾아야 하는데….
오, 죄송해요, 주님.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죠?’
더 나쁜 것은 내가 늘 기도 모임들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죄책감에 대해 이야기해보라).
그 모임들은 기도하는 방법을 알 뿐만 아니라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계속되는 것 같았다.
기도 시간에 다른 사람들과 손을 잡아야 할 때마다 정말 급속도로 이상해지는 듯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는 길고 요란하고 화려한 기도 대신,
단순하고 진실하며 진심에서 우러난 기도이다.
그러나 단순한 것과 안전한 것은 다르다.
내가 기도 생활에서 범한 가장 큰 잘못이자
내 기도들이 그토록 변변치 않았던 이유는 바로 너무 안전하게 기도했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 안전지대에 있었다.
그것은 시시하고 미지근한 대화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나는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았다.
나의 기도들은 미지근했다.
안전하고 미지근한 기도들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거나
우리가 이 세상에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주시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와 대화하시는 부분을 읽으면서 기도에 대한 이 생각이 분명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셨던 예수님은 하나님께 다른 길이 있는지 물으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냥 보통의 제자나 성경 인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연약하고 위험한 복종의 기도를 하셨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예수님은 자신이 하지 않으신 일을 우리에게 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편안한 삶이 아니라 믿음의 삶을 살라고 하신다.
더 안전하고 더 쉽고 스트레스가 없는 삶을 위해 그분께 나아오는 대신,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사랑하는 모험을 하라고 도전하신다.
내 일상의 욕구들을 채우는 대신, 영원한 것을 위해 그것들을 부인하라고 하신다.
원하는 것을 따라 사는 대신, 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본을 따르라고 하신다.
나를 살피소서.
나를 깨뜨리소서.
나를 보내소서.
성경에서 이끌어낸 이 세 가지 기도는 짧고 단순하며 솔직하겠지만 안전하지는 않다.
이 위험한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확장하고, 마음을 넓히며, 삶을 하나님께 열 것이다.
실제적이고,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친밀한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하려 할 때
하나님은 영적 안전함이라는 환상으로 우리를 감싸지 않으신다.
대신 ‘나에게 무엇이 돌아올까’라는 환상을 깨뜨리시고,
하나님이 다음에 무엇을 하실지 모를 때 그분을 신뢰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어떤 날에는 복을 받았다고 느끼고, 다른 날에는 도전과 반대와 박해에 직면한다.
하지만 위험한 기도를 드리는 모든 순간은 그분의 임재로 가득할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의 기도가 복권을 사는 것 같을까 봐 걱정된다.
즉 이 땅에서 아무 문제 없고, 스트레스 없고, 고통 없는 삶을 살 기회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에게 기도는 좋아하는 노래나 어릴 적 부르던
사랑스러운 동요의 가사를 외우는 것처럼 그저 감상적인 일상사에 불과하다.
반면에 다른 이들은 그저 기도하지 않으면 더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에 기도한다.
이런 기도들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려고 오신 생명을 나타내지 않는다.
대신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뜻을 버리라고 도전만 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 또한 위험한 믿음의 삶을 사셨다.
나환자들을 만지셨다.
창녀들에게 은혜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용감하게 위험에 맞서셨다.
그다음에 우리도 그분이 하신 일을 할 수 있고,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단순히 우리의 양식을 축복해달라거나
“오늘 우리와 함께해달라”라고 요청하는 데 만족할 수 없는 이유이다.
당신은 더 많은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단지 위험을 피하는 것에 진력이 났는가?
대담하고, 믿음이 충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도들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러나 조심하라. 장애물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저를 살피소서, 저를 깨뜨리소서, 저를 보내소서” 같은 기도를 하기 시작할 때
골짜기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공격. 시련. 고통. 고난. 좌절. 비통함까지.
그러나 또한 믿음의 기쁨, 기적의 경이로움, 굴복함으로 인한 안도감,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즐거움도 있을 것이다.
이제 안전한 기도를 멈출 때이다.
하나님과 진정으로 대화하고 진정으로 그분의 말씀을 듣기 시작할 때이다.
위험한 기도를 드릴 때이다.
-위험한 기도, 크레이그 그로쉘 / 규장
† 말씀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 시편 27편 8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 시편 34편 18절
† 기도
하나님, 당신을 더 친밀히 알고 싶습니다.
그러기에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기도, 이제 더 이상 안 드리고 싶습니다.
매일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본을 따르게 하소서.
하나님과 진정으로 대화하며 말씀을 듣게 하소서.
저를 살피소서, 저를 깨뜨리소서. 저를 보내소서.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읽을 말씀 : 베드로전서 1:13-25
● 벧전 1: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영국의 유명한 화가 프레드릭 왈츠가 자신의 새로운 작품을 공개하는 날이었습니다.
어두운 지구 위에 비파를 가슴에 끌어안고 쓰러져 있는 여인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것 같았습니다.
시력을 잃었는지 눈은 가려져 있었고 들고 있는 비파의 현은 한 줄을 남기고는 모두 끊어져 있었습니다.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이었던 이 작품은 평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한참 동안 그림을 보던 평론가들은 그림의 제목이 ‘절망’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림의 모든 표현이 절망적인 상황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잠시 뒤 왈츠가 앞으로 나와 작품의 이름을 발표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작품의 이름은 ‘희망’입니다.”
평론가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왈츠가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희망 뒤에는 희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절망 뒤에만 희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였기에 주님이란 희망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나를 위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희망을 품으십시오. 아멘!!
주님!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지켜주시는 주님을 믿게 하소서.
절망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희망을 품읍시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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