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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편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언제나 우리가 찬양하는 대상을 향해 흘러간다

by 안규수 2022. 6. 24.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오늘도 새 날, 새 호흡, 새 힘, 새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멋진 하루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찬양은 하나님을 온 맘으로 누리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얼마만큼 누리며 사느냐는 그 인생이 길든 짧든 얼마나 풍성한 인생을 사느냐를 결정짓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두셨다.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때 우리는 다른 무언가를 찬양하며 살기 때문이다. 
돈을 찬양하고 권력을 찬양하고 내가 의지하는 사람을 찬양하고 때로는 ‘자아’라는 대상을 찬양한다.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선용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넘어 
마치 그것들이 우리를 영원한 그 나라로 이끌 수 있는 양 몰입하며 찬양한다. 
그러나 그 최종결과는 참혹하고 비참할 뿐이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언제나 우리가 찬양하는 대상을 향해 흘러간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도 그렇지만 기도할 때는 더더욱 찬양의 음악을 틀어놓는다.

찬양은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로 집중하도록 이끄는 최고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 노래에 잠겨 기도하다 보면 세상 근심과 걱정에 눌려있던 내 영혼이 자유를 얻고, 
세속의 가치관에 물들어 혼탁했던 생각이 정결함을 입는다.

찬양의 노래에 마음과 영혼을 싣다 보면 어느덧 나 자신도 다윗처럼, 주님을 의뢰하여 적진으로 달리며 
하나님을 의지해 고난의 성벽을 훌쩍 뛰어넘는(삼하 22:30) 능력의 용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2년 반 전부터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라 할 만한 코로나 사태를 맞이하면서 모두 힘겨운 세월을 살아내고 있다. 
마치 다윗이 굴속에 숨어 지냈던 세월처럼 우리도 무언가에 쫓기듯 숨죽여 지내고 있다.

그러는 사이 세상은 급속도로 변해갔고 이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교회인 우리는 정체(停滯)를 넘어 퇴행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말았다. 
한 날 한 날 하나님과 동행하며 간절하고도 절박하게 살아야 할 이 시기에 하나님의 손을 놓아버린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 그 증거들이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는 어떻게 이 견고한 진을 뚫고 하나님나라를 향해 전진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질 때마다 나는 오래전에 나온 책 《다윗의 장막》의 내용을 떠올린다. 
‘하나님의 임재’에 관해 다룬 그 책에서는 사람이 처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상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를 열망하지 않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가 위기의 시대를 뚫고 전진하려면 ‘찬양’이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은 강력하게 알려준다.

어떻게 해야 당신 교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는지 알겠는가? 
어떻게 해야 부흥을 막고 있는 거대한 산을 두 동강 낼 수 있는지 알겠는가?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했던 대로만 하라. 
등은 두들겨 맞고, 발은 족쇄에 매이고, 감옥문은 잠겨 있더라도 
당신이 한밤중에 찬양할 수 있다면 당신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와 영광이 임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의 무게 아래서 모든 더러운 것은 무너지고 모든 매인 것이 벗어질 것이다.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 16:26).)

우리는 지금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처럼 손발이 묶인 시대를 살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지난다 해도, 시대는 점점 더 어려워져 언젠가는 손발뿐 아니라 눈과 입까지 막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시대가 온다 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족쇄를 풀어주시고 
우리의 발을 뛰게 하시며 우리의 입을 열어 할렐루야를 외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임하시면 그분은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부흥도 친히 이루실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기도가 막힌 듯 가슴이 답답할 때면 이어폰을 꽂고 찬양을 들으며 산책기도에 나서곤 한다. 
언젠가 내게 “너는 나와 함께 걷자” 하신 주님의 음성을 떠올리며, 
마치 에덴동산에서 주님과 교제했던 아담처럼 나 역시 하나님과 도란도란 교제하려는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찬송을 나지막이 따라 부른다.

“나의 주 나의 주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주
모두 절하고 모두 외치세 예수는 나의 주”

예수님의 부활을 외치는 이 찬양을 부르다 보면 
잔뜩 눌려있던 나의 몸 가운데 예수님의 생기가 불어넣어져 어느덧 힘찬 걸음으로 동네를 걷게 된다. 
그러면 나는 성령에 감화되어 2절을 부르며 그분을 또다시 경배한다. 
2절 가사도 1절과 똑같고 다만 ‘나의 주’를 ‘너의 주’로 바꾸어 부르면 된다. 
3절은 ‘우리 주’로 바꾸어 부른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 나를 위한 것이고 너를 위한 것이며 우리를 위한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찬양은 참 신비롭다. 
우리는 입술을 열어 찬양을 부름으로써 하나님을 높여드리는데, 그 찬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낮고 낮은 땅에서 부르는 나의 노래 속에 찾아와 작고 연약한 내 곁에 머무시며 기뻐하신다. 
그러면 놀랍게도 찬양 속에서 기도하고, 기도 속에서 찬양하는 신비가 펼쳐진다.

가령 “죽음에서 부활하신 너의 주”라는 찬양 한 절을 부르는 동안, 
고통에 짓눌려 길을 잃은 지체들의 모습을 떠올려 주님께 올려드리고 
그 죽음과 같은 고통의 문제를 뚫고 일어나 새 길을 가게 하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는 식이다. 
찬양 한 절을 부르는 동안 지체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드리게 됨은 물론, 
우리를 죽음의 권세로부터 이기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온 맘과 영으로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날이면 나는 비로소 안다.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앞으로 무얼 위해 살아야 하는지. 
다윗이 고백했던 그대로 “내 평생에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며 찬양하는 것”(시 27:4)이 나의 단 하나의 소원이자 갈망으로 변한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면, 그간 세상이 부러워 기웃거리거나 주눅 들거나 하던 사람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는 사람으로, 하나님나라를 향해 담대히 전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 나는 기도하기로 했다, 한근영 / 규장

† 말씀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 시편 63장 3, 4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 히브리서 13장 15절

† 기도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온 맘으로 누리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찬양을 통해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시 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

영국에는 유난히 출입문이 낮은 한 교회가 있습니다.
허리를 많이 숙여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이 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를 들어갈 때도 겸손해야 하지만 세상으로 나갈 때에도 겸손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둘째는 허리를 세우면 머리를 부딪히듯이 교만하면 반드시 사고가 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걸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무지한 것이며 
자신은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기에 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네덜란드의 마르셀 비엔만 교수에 따르면 학생들의 성적에는 타고난 ‘아이큐’보다 ‘메타인지’라는 생각의 구조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메타인지는 바로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을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아이큐는 성적에 20% 정도 영향을 줬지만 ‘메타인지’는 40%가 넘게 영향을 줬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상위 0.1%에 속하는 학생들은 아이큐가 아닌 메타인지가 다른 학생들보다 월등히 높았습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내가 알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알 수 없는 일들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모르는 일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있기에 아는 일들을 최선을 다해 감당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다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일들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아멘!

주님!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큰 뜻을 알아가게 하소서.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에는 최선을 다합시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