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다 보면 나쁜 일이 생길 때가 있다. 문제는 나쁜 일은 더 나쁜 일을 부르고, 더 나쁜 일은 훨씬 더 나쁜 일을 데려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재난은 혼자 오지 않는다. 그럴 때면 온통 미운 것 투성이다. 힐끔거리는 사람, 가는 데마다 빨간불인 신호등, 발에 채이는 돌멩이, 심지어는 아무 죄도 없는 새파란 하늘도.(다만 돈은 안 밉습니다요. 하하 ^^;)
세계 멸망을 꿈꾸는 빌런(악당)으로 흑화되기 일보 직전, 대체로 하는 짓은 숨는 일이다. 상처 입은 짐승들은 굴로 숨기 마련. '하지만 인간에게는 굴이 없는걸?' 걱정을 마시라. 인간에겐 노래방이 있다! 세상이 날린 따귀에 볼을 움켜쥐며, 우리는 지하 노래방으로 숨어든다.
세기말의 필자도 그러했다. 복학하자마자 IMF 위기가 터졌고, 졸업을 앞두고 있던 필자가 갈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모두가 쓸모와 효율을 외쳤고, 비효율은 악의 근원인 시대로 바뀌었다. 철학과인 필자가 화형당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뒤늦게나마 도서관에는 열심히 다니고자 했는데, 웬걸? 정신을 차리고 보면 늘 엉뚱한 곳이었다.
그중 가장 자주 다닌 곳은 '울프스 부르크'라는 주점이었다. '늑대의 성'이라니! 상처 입은 짐승들이 숨어들 곳으로는 이름부터 제격이었다. 영화 '록키 호러 픽처쇼'에 나오는 흡혈귀들의 성같이 생긴 외관에, 어두컴컴한 계단으로 내려가면 노래방 기기와 커다란 스크린이 갖춰져 있었는데,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늘 한산했다는 점이었다. 그곳에 드나드는 이들은 사회인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야수로 전락한 자들이었으니까. 쓸모없는 야수인 우리는 그곳에 숨어 들어가 있는 힘을 다해 악을 쓰며 '말 달리자'와 '청춘 98'을 불러 제꼈다.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은행에 들어가고, 대기업 상사맨이 된 선배, 동기, 후배들에 대한 질투와 선망, 내가 아니라 걔들을 뽑은 세상에 대한 저주 그리고 앞날에 대한 불안을 말끔히 씻어낼 우리의 주문을 혼신을 다해 외쳤다. 귀담아 들어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지만.
밤낮없이 '늑대의 성'을 드나들었던 우리를 보고 사람들은 혀를 찼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놀려고 간 게 아니라 살려고 갔다(김애란, 위의 책). 세상이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고 멸시의 눈길을 던지는 것을 무력하게 견뎌내야만 하는 이들은 각자의 상처를 핥으러 노래방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부르는 신나는 노래는 노래가 아니라 살려는 외침이다. 등 돌리려는 세상에 엉겨 붙으며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몸부림이다. 돌아보지 않을 것은 뻔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붙잡고 싶은 건 등 돌린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몇 달 전 누구를 만나러 모교 앞을 지나게 되었다. 청년들은 여전히 도서관과 카페에서 노트북과 책을 펼쳐 놓은 채 무언가에 열심이었다. '쉬었음' 청년 인구가 44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쉬었음'이라는 게 온당한 이름인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하려는 의지도 없이 게으름이나 피우고 있다는 흘김이 보여서 말이다. 우리들의 요새, '늑대의 성'은 잘 있는지 살펴봤다. 주변은 어마어마하게 높은 빌딩과 깨끗한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있었다. 쓸모 있는 이들의 성소였다. 44만 명의 늑대들이 숨 돌릴 자리는 아무 데도 없어 보였다. 봄인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한길석 중부대학교 학생성장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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