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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수필

워낭소리에 감기는 노을

by 안규수 2014. 11. 17.

고 이귀복선생님을 기리며


어제 밤 '정호경 수필마을 <자유게시판>'에 들어갔다가 '고 이귀복'작가의 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뇌암으로 2년 넘게 힘든 투병을 했지만, 보람도 없이 지난 10월 30일 깊은 밤에 저 세상으로 떠나신 것입니다. 생전에 님과 교분은 없었지만 에세이스트 25호의 '아버지의 난닝구'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고, 그때 무척  깊은 인상을 남기신 분이기에 평소 님의 작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님이 남기신 수필집 <사금 한 조각>에서 수필 한 편 올림니다. 이 작품은 소재와 구성이 문명의 폐해와 자연과 생명, 농촌과 도시, 횡사한 새와 제명을 다하고 죽은 소, 화학비료와 유기농을 모티브로 대칭화하고, 개나리 울타리에서 죽은 새와 영화<워낭소리>를 대비 시켜 현대의 생명경시 풍조, 물질만능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워낭소리에 감기는 노을

                                                                                    이 귀복


  개나리 울타리를 무심코 지나치던 첫날에는 그것이 털실뭉치 인 줄 알았다.그러나 잠자리에 누웠을 때 그것은 털실뭉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다음 날 다시 그곳에 가서 그 털실의 정체를 확인했을 때 나는 내 직감이 원망스러웠다. 검은색과 흰색, 그리고 회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그것은 털실뭉치가 아닌 작은 새였다.

  새가 죽어 있었다. 나는 개나리 울타리 아래 눈을 감고 있는 새를 바라보았다. 새에게도 표정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고개를 외로 돌리고 눈을 감은 모습이 꼭 울다가 잠든 아기 얼굴 같다. 아직 윤기 흐르는 회색 깃털 위로 개나리 꽃잎 하나가 소리없이 떨어진다.

  가끔 큰길에서 차에 치어 죽은 비둘기를 본 적은 있었다. 처참하게 뭉게진 그 위로 차들이 질주하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했던 때와는 달리 영문도 모르게 죽어 있는 새를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했다. 비둘기들은 둔한 탓에 미처 차를 피하지 못해 변을 당한다고 해도, 이 작은 새가 차도도 아닌 개나리 울타리 아래에서 왜 죽어있을까. 혹시 아이들이 새총으로? 그러나 학원 다니기에도 바쁜 도시 아이들에게 새총 따위는 유물이 된지 오래다. 그렇다면 혹시 어제 그 일 때문인가.

  어제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다가 석연치 않은 광경을 보았다. 낯선 남자 하나가 아파트 녹지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 마다 무엇을 휙휙 뿌리며 지나갔다. 그 남자는 내가 일구어놓은 화단에도 선심 쓰듯 그것을 잔뜩 뿌렸는데 한참 후에 나는 그것이 화학비료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파트 관리소에서 때맞추어 수목들에게 비료를 뿌리는 모양이었다. 큰 나무들에게야 비료가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얼마 전 뿌린 꽃씨에서 여린 새움이 트고 있는데 구분도 없이 마구 화학비료를 뿌려댔으니 올해는 꽃을 보기가 틀린 것 같아 은근히 속상해있던 차였다.

  그 일이 있은지 하루 만에 녹지의 울타리에서 새의 주검을 본 것이다. 내 짐작대로라면 새가 죽은 것은 어제 비료를 뿌린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 새는 혹시 독한 비료가 묻은 모이를 쪼다가 죽은 것은 아닐까.   

  비록 아파트지만 오랫동안 나는 뒷베란다 녹지에서 꿈을 키웠다. 날마다 찾아오는 야생 고양이는 우리집 강아지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은 까치와 함께 소나무에 앉아 아침마다 우짖었다. 자목련이 붉은 연등을 켜들던 며칠 전,나는 키 작은 목련나무 가지에 풍선 세 개를 매달아 주었다. 해마다 찾아오는 목련에게 반가운 내 마음을 그렇게라도 전하고 싶었다. 그런 녹지의 울타리 아래서 새가 죽어 있다니!


  딸랑딸랑 워낭 소리가 들린다. 망초꽃 사이로 늙은 소가 느릿느릿 걷고 있다.베잠방이차림의 할아버지는 꼴을 얹은 지게를 지고 소의 뒤를 따르고 있다. 소의 눈빛도 할아버지의 눈빛도 무심 그 자체다. 사람과 동물, 그리고 생명이 함께 어우러지는 지순한 합일, 지금 나는 영화 <워낭소리>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워낭소리의 할아버지는 고집스럽게 농약을 치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 유기농에 대한 대단한 신념 보다는 농약에 오염된 꼴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농약을 치지 않고 농사를 짖는 일은 노인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굽은 등으로 논바닥에 엎드려 김을 메던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자연과의 공존이었다. 농약을 치지 않았으니 수확량은 당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는 일. 보다 못한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지청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농약 안치면 벌레가 다 묵어뿌리는데 사람은 뭐 묵능교?"

  할머니의 바가지를 듣는 둥 마는 둥, 할아버지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곤충들과 나누고 남는 것만을 자신의 몫으로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무위자연' 그것이었다.농사에 대한 할아버지의 태도는 완강하기 그지없었다. 이웃은 트렉터를 사용하여 눈 감짝할 사이에 추수를 끝낼 때 할아버지는 일일이 낫으로 벼를 베었다. 할머니나 이웃들의 눈에는 속 터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건 완전히 원시로 돌아간 농경방법이었다. 그러나 문명이 사람을 편리하게는 할지언정 자연의 마음까지 헤아리지는 못한다.인간이 노동을 통해서만이 자연은 그 이치를 깨닫게 한다.

  "손으로 베면 나락이 덜 나가!"

  문명의 허상을 뒤집는 할아버지의 명쾌한 한마디, 할아버지는 결코 문명에 뒤진 것이 아니라 문명과 타협을 거부 했을 뿐이었다. 할아버지의 그 말은 할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평생 흙과 함께 살아온 사람만이 터득할 수 있는, 자연의 잠언을 대신 들려 준 것뿐이었다. 할아버지는 트렉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그것과 나락 한 알의 가치를 미련없이 바꾸어 버린다. 할아버지에게 나락 한 톨의 단순한 곡식이 아닌 생명의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랬다. 할아버지 주변의 모든 자연, 소도 나락도 청개구리도, 심지어 들판에 핀 민들레에 이르기까지 할아버지가 사랑한 것은 결국 생명이었든 것이다.

  할아버지를 도와 한평생 일만 해온 늙은 소, 한아름 땔감을 등에 싣고 지친 걸음으로 걸어가든 소의 삶이 조금은 가엾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그 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임이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그 소는 진정 소답게 살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인도가 아닌 우리 땅에서 코뚜레를 하지 않고, 들판에 나가 일하지도 않는다면 그가 가야할 곳은 오직 한 곳밖에 더 있겠는가.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한 뒤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 소, 인간과의 깊은 교감 덕분에 평균 수명을 훨씬 넘은 마흔 살까지 살았던 그 소는 문명에 길들어진 우리들에게 이제 전설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는 스스로 상주가 되어 함께 일하던 밭에다 소를 묻었다. 할아버지의 손에 의해 자연으로 돌아간 소는 진정 행복했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 그 무덤 위로 눈보라가 치고 다시 민들레가 피어났다. 자연과 함께 우주의 모든 것은 끝없이 피고 진다.

  고기값으로 치면 60만원도 안 되는 소를 생명의 가치로 승화 시킨 할아버지, 영화<워낭소리>는 우주를 집으로 알고 살아가는 생명들을 돌아보게 한 서사시였다.

  개나리 울타리 아래에서 죽어있던 그 새는 정녕 천명을 누렸던 것일까. 자꾸만 눈에 밟혀 묻어주려고 꽃삽을 들고 나가보니 이미 새의 주검은 보이지 않는다. 깨끗하기로 소문난 신도시, 부지런한 청소부가 쓰레기와 함께 새의 주검까지 쓸어 담았는지 빗자루 자국만 선명할 뿐이다. 위대한 문명시대를 살았던 그 새의 무덤은 자연이 아니라 몇 십 년 동안 썩지도 않는다는 시퍼런 비닐봉투 속이었을 것이다.


  딸랑딸랑 워낭소리가 들린다. 노을이 깔린 시골길을 늙은 소와 할아버지가 걸어가고 있다. 워낭소리에 붉은 노을이 감긴다. 우리들의 눈부신 목숨도 함께 감긴다. <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