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날 고향에 들렀다. 선영에 참배하고 마을에서 잠시 머물다가 . 친구 병문안을 갔다. 태식이가 작년 겨울에 대장암 수술을 했다. 경과가 좋아서 봄부터 가벼운 일을 했는데 가을이 지나면서 상태가 나빠져 읍내 의료원에 입원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동기들보다 네 살이 많은 태식이는 덩치도 컸고 힘도 제일 셌다. 교실 밖에서는 언제나 대장이었다. 같은 마을에서 다닌 나는 나름대로 졸병 노릇에 충실했는데 졸업을 하자 우리의 관계에도 변화가 왔다.
나는 진학을 해서 대구로 나갔고 그는 제대로 농사꾼이 되어갔다. 방학 때 마주쳐도 서로가 어색했다. 청년 티를 풍기던 태식이는 제 또래들과 어울리면서 동기들을 어린애 취급을 했다. 마을에서는 이미 큰 일꾼 대접을 받고 있었고 술과 담배에도 익숙한 것 같았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태식이가 장가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거북했던 우리 사이가 회복된 것은 중년이 되어서였다. 서로의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던 것일까. 어린 시절의 기억이 소중히 여겨질 만큼 세월이 흘렀던 탓일까. 가끔 술잔도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고향의 빈집 관리도 편하게 부탁할 수 있었다.
태식이는 보통 장정 두 몫의 일을 하고 평생 쉬지 않고 고생했지만 형편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농촌의 살림살이가 늘 그런데다가 집안에 이러저런 우환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래도 태식이는 여전히 씩씩했고 갈수록 낙천적이 되었다. 그는 무엇이든 쉽게 받아들이고 항상 큰소리를 쳤다. 큰 염려거리도 태식이 앞에 가져가면 대부분 사소한 일로 변해버렸다.
환자의 상태는 짐작했던 대로 좋지 못했다. 보름 전보다 체중이 더 빠진 것 같았다. 음료수를 나눠 먹고 동창들, 그러니까 옛날의 졸병들이 모두 걱정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잠깐 기뻐했다. 한차례 통증이 지나간 뒤에 태식이가 말했다.
“니 옛날에 가마소(沼)를 물속으로 걸어서 건너던 거 생각나나?”
생각나고말고. 마을 앞을 지나는 강에서 가장 깊은 곳이 가마소였다. 서너 길 깊이에 폭은 스무 걸음이 족했다. 가끔 청년들이 돌을 안고 물속을 걸어서 건너는 내기를 했는데 초등학생 중에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태식이 뿐이었다. 태식이가 양쪽 귓구멍에 침을 발라 넣고 서서히 물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모두 숨죽여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의 말대로 이무기를 피하고 처녀 귀신을 뿌리친 뒤, 건너편에서 솟구쳐 올랐을 때 우리는 환호했고, 되돌아 왔을 때는 들고 온 돌의 크기에 경탄했다.
“너 참 대단했지! 바위만한 걸 어떻게 들고 왔냐?”
“물속에 들어가면 웬만한 건 들고 견디겠더라. 무거울수록 중심을 제대로 잡을 수 있어서 뜨거나 휩쓸리지 않고 끝까지 건널 수가 있었제.”
잠시 그 시절의 위용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자주 그때가 생각나더라. 살면서 힘들 때마다 흔들리지 않고 강을 건너기 위해 돌을 안고 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잘 버티어 왔는데 이번에는 감당이 안 되네. 너무 무겁다. 바위 같애.”
통증이 다시 오는지 말을 끊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두 손을 감싸 쥐고 눈을 감았다. 고통은 은총이다. 어두워야 별이 보인다. 죽음은 없다 다만 모습이 변할 뿐이다. 고통은 신비다...... 고통의 의미를 정리하고 위로한 말들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한갓 빈말일 뿐이었다.
환자가 기어코 병실 문밖까지 따라 나왔다.
“바위는 우리가 같이 들어줄게. 설 지나고는 집에서 만나자.”
“그래, 그러께. 그러자.”
태식이가 밝게 웃으려고 했다. 그 표정이 선물처럼 고맙고 슬펐다. 악수를 하고 마주 보고 웃다가 다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밖에 나오니 저녁놀이 사라지고 있었다. 어둠에 잠기는 병동이 고요했다. 태식이도 여기서 걸어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다시는 마을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 눈길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음에 들렀을 때는 더 좋아져 있을 것이다. 어쨌든 씩씩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내 친구는 강을 건너는 법을 잘 알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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