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집
어현
2005년 농민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죽음이지만 삶의 과정이고 완성이라 생각하면 동전의 앞뒤처럼 사는 것과 떨어질 수 없게 느껴졌다. 삶을 삶일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죽음의 역할이고 살아 있는 것의 가치는 죽음이 있을 때 비로소 빛날 수 있다. 언뜻 보면 삶의 배경처럼 보이지만 한 생을 마감할 즈음이면 조연처럼 머뭇거리던 죽음이 엄청나게 큰 실체로 다가왔다. 듣기 좋은 말로 생의 완성이지 세상 밖으로 영원히 퇴장시키기에 사력을 다하는 것 같았다.
한 하늘 아래서 같은 공기로 숨쉬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란 관문을 거치고 나면 절망이란 말조차 호사스러운 완전한 단절이 왔다. 어떤 법칙이나 의미도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거역할 수 없는 지점이다. 어느새 여러 명의 사람들이 그곳으로 가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잡동사니 같은 것들이 머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직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이 싸우고 헐뜯고 살을 부비는 동안 육신을 잃은 자들이 머무는 곳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집수리를 하던 여름 끝자락부터 가을이 될 때까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끈질기게 따라온 의문이었다.
두 계절에 걸쳐 이어진 수리는 공간을 실용성 있고 효율적으로 바꾸려고 오랫동안 벼르던 일이었는데 실상은 대청소를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생각했던 그럴듯한 구호는 뒤로 한 채 낡고 묵은 살림들을 버리고 바꾸는 일에 전념했다. 쓰레기더미에서 산 것도 아닐텐데 버리거나 새 것으로 바꾸어야 할 살림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는 게 신기했다. 하기야 이 터에서 시아버지와 시할아버지가 저 세상으로 가고 아이들이 태어나 자랐으니 집안 구석구석에 묵은 것들 천지인 게 오히려 당연했다.
구질구질해서 당장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살림을 장만했을 때를 생각하면 어느 것 하나라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주춤거리며 집안을 돌아보는 동안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 토기 화분 앞에서 발을 멈추게 되었다. 아직 그 화분이 집안 한 구석에 남아 좁은 화단을 눈에 거슬릴 만큼 넓게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새삼스러워서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 옆이 금이 간 채 깊은 구덩이 같은 속을 공허하게 내보이고 있는 빈 화분을 보자 수백송이의 동백꽃이 그 속에서 피고 졌다는 게 거짓말처럼 여겨졌다.
새삼 토기 화분에서 핀 동백꽃을 처음 보았던 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꽃의 만발에 놀라기보다 진짜 꽃일까 의심부터 했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날의 날씨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봄이라고 하지만 겨울옷을 벗기에는 이른 절기였던 때 거실에 핀 붉은 꽃들은 이상스런 충격을 주었다. 두꺼운 옷을 입고도 추위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 앞에 보드랍고 연약해 보이는 꽃 이파리들을 차가운 공기 속에 서슴없이 활짝 펼치고 있는 모습은 아름답다는 생각 보다 놀라움이었다. 화분으로 다가가 꽃송이를 심문하듯 살피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서야 꽃을, 동백나무를 그리고 토기화분에 담긴 흙을 인정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집안 곳곳에서는 늘 꽃이 피고 졌고 그런 일들 뒤에 시아버지가 있었다.
길거리에 뒹구는 하찮은 잡초도 그의 손이 닿으면 그럴듯한 화초가 되어 화분에 담겨 졌다. 화분뿐 아니라 마당에는 대추나무와 목련 그리고 사철이 터를 잡고 있었고 화분이란 표현이 어색할 만큼 커다란 비닐 함지에서 뻗어 나온 포도넝쿨들은 뜨거운 여름햇살이 내리쬐는 옥상을 시원한 그늘로 만들어 주었다. 천리향과 동백과 철쭉 그리고 칸나와 국화가 때에 맞추어 피고 졌고 달콤한 포도와 윤기 흐르는 대추가 계절의 맛을 보게 해 주었다. 그의 죽음이 있기 전까지 그러했다.
그의 죽음이 있은 후에도 꽃들은 아무 일 없었던 듯 제 소임을 다 했다. 식구들은 그가 집을 비우고 긴 여행을 떠나기라도 한 듯 그의 부재를 잊곤 했다. 그의 손에 피고 졌던 꽃과 나무들에 대해서도 무심히 지나쳤다. 그러나 사람은 잊고 살지만 자연은 어김없이 절기에 맞추어 움직였다. 피고 지고 열매가 맺고 낙엽이 질 즈음이면 화초에 북을 돋우어 주고 제 멋대로 자라는 나뭇가지를 쳐내며 사월의 목련 아래서 웃던 그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스치곤 했다. 그러면서 문득 죽음 너머의 그가 여전히 자신이 길들여 놓은 것들을 원격조종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의문스러웠다. 세상의 어떤 이치도 통하지 않는 지점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들의 사이를 떠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죽은 자들은 어디에 머물고 있기에.
해가 바뀌고 계절이 변하는 동안 그가 떠난 자리에 달라지는 게 있었지만 쉽게 눈치챌 수 없었다. 식구들이 잠이 들거나 집을 비우거나 웃고 떠들며 제 이야기에 빠져 있을 때 그의 손길이 닿았던 것들에게 미미한 움직임과 가녀린 호소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아챌 수가 없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그랬다.
천지가 녹아내리는 폭염의 어느 날이었다. 외출을 마치고 대문으로 들어서려는데 한순간 온 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더위도 잊은 채 대문 앞 그 자리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굳어 있었다. 화분에서 쏟아져 나온 화분 형태가 남아 있는 흙과 그 사이로 뻗어 나온 메마른 뿌리가 하늘을 향해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붉디붉은 꽃을 피워내던 그 동백나무가 분명했다. 장례식에서도 담담했던 나는 그제야 죽음을, 완전한 한 사람의 죽음을 보고 있었다. 그에게 길들여진 꽃과 나무들은 세상에 남긴 흔적들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그렇게 한둘씩 죽어 갔다.
지금은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온갖 꽃향기가 넘쳐나던 때가 있었다. 기억 속의 꽃들은 여전히 싱싱하고 향기롭다. 죽은 자들도 그 꽃들처럼 한때 사람의 냄새를 풍기며 웃고 떠들었을 터였다. 그들은 함께 살았던 사람들과 나눈 기억을 통해 때로는 슬프고 아름답고 가슴 아프게 산 사람들을 꾸짖고 가르치며 눈물짓게 했다. 산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맞을 때까지 죽은 자들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시간 안에서 살아 있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황폐해진 화단에서 자상했던 그의 손길을 떠올리는 것처럼.
비로소 죽음의 의미가 하늘이나 땅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온전히 들어오는 일이란 걸 알았다. 산 자들은 기억 속의 그들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대화하고 있다. 어쩌면 진정한 삶의 완성은 죽음이 아니라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이 아닌가 싶다. 어떤 기억을 남기느냐에 따라 온전하거나 혹은 어긋난 삶으로 평가될 수 있을 터이니까.
살아 있는 모든 자들은 죽음으로 걸어간다. 그들의 과제는 죽음을 지켜볼 사람들의 머릿속에 아름다운 영혼의 집을 짓는 일이다. 죽은 자의 무덤은 산 자의 기억 속이므로.
<'이상렬의 수필 감상'에서 퍼온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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