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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수필

수 박 / 임지영

by 안규수 2016. 8. 28.

수 박

임지영
제4회 문향 여성 문학상 차하

  먼지가 풀풀 이는 바닥에 수박덩이 몇 알이 가지런히 누웠다. 다행이다. 볕이 내리쬐는 정오에도 너른 잎을 펼쳐 제 몸을 가린다. 매끈하고 딱딱한 껍질이 만져진다. 이 껍질 덕분에 땅속의 비료나 거름의 나쁜 성분들이 수박 속으로는 스며들지 못한다. 
  딱딱한 겉껍질과 연한 속살의 수박은 마치 우리 인생과 다를 바 없다. 사람은 누구나 딱딱한 겉껍질 속에, 갈라보기 전에는 모르는 연한 속살을 감추며 산다. 다치지 않을까하여 쉽게 속을 내 보이지 않는다. 고난 속에서는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겉으로 강하지만 속은 하염없이 여린 그런 사람, 난 수박을 먹을 때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알고 보면 분명 가뭄에 자란 수박일진대 어찌 그리 단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걸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수박을 닮은 아버지는 또 수박을 좋아하신다. 냉장고에 반찬은 없어도 수박은 꽉꽉 들어차 있던 친정집 냉장고가 그려진다. 가족들 중 식사를 제일 빨리 끝마친 아버지가 항상 과일 담당이었다. 아버지가 과일을 깎는 모습이 우리 집에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과도도 아닌 큰 칼로 과일을 깎으시는데 아버지 손만 닿으면 순식간에 그 껍질이 벗겨졌다. 난 오른손으로는 밥을 먹으면서 왼손에는 아버지가 쥐어주신 과일이 손에 들려있었다. 아버지에게 예쁘게 과일 한번 깎아 드릴 여가 없이 시집을 왔다. 지금 이라도 내가 깎으려 다가가면 아버지는 웃으시며 항상 “놔둬라.”한다. 가끔 친정에 들릴 때면 수박은 개수가 많아진다. 아버지는 나에게 주려고 수박을 사시고, 우리는 아버지 좋아한다고 수박을 사갔다. 
  휴일 끝자락, 서산의 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깔리면 아버지의 얼굴빛도 덩달아 어두워진다. 이제 제 집으로 가야 하는 딸년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써 표정을 숨기지만 ‘니들 다 가면 나 섭섭해서 어떡하냐’는 말이 얼굴에 씌었다. 앉았다 일어났다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버지가 먼저 말씀을 하신다.
  “어여~일어나, 늦었어”
  둘째아이는 이미 잠이 들었다. 서둘러 차에다 몸을 실었다. 아버지는 검정색 봉지 몇 개를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거절하는데도 기어이 쥐어 주신다. 어여~가라고 손짓하시는 아버지. 떠나고 떠나보낸다. 결혼하고 수십 수 백 번 보는 똑같은 장면인데도 어찌 매번 이리 마음이 아릴까 모르겠다.
  큼큼하고 고소한 냄새가 진동한다. 봉지 냄새다. 신문지에 싸둔 몇 개를 풀었다. 말린 산나물 몇 움큼, 참기름 한 병. 흙 내음과 섞여 내어 품는 아버지의 냄새가 찡하게 코끝으로 전해온다. 아직도 손을 흔들고 계실 아버지, 차마 뒤돌아 볼 수 없었다.
  시집오기 몇 년 전이었다. 어둠은 옅게 내려앉고, 달빛은 서성이던 밤이었다. 열린 창틈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달그림자 뿐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담배연기다. 쉬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버지, 분명 끊었던 담배였는데 다시 피우신다.
  초저녁에 걸려온 삼촌의 전화 때문이었다. 평소 잔잔한 물결 같은 아버지답지 않았던 격앙된 목소리를 통해 통화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애지중지 지켜왔던 조상의 땅을 삼촌이 몰래 팔았던 것이었다.
  드르륵 드르륵, 아버지는 숨이 죽어 기름기 다 빠진 신발을 신고 터벅터벅 걸어 서산과 가까운 마당 끝으로 나갔다. 처음부터 아버지의 자리였던 그 자리, 우리 집에서 달빛 제일 밝은 곳이다. 한참동안 꼿꼿이 서서 거룩한 의식이라도 치르듯 또 개피 하나를 꺼내 태우셨다. 담뱃재 한 번 툭툭 털며 근심도 터시고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 위로 피어오르는 담배연기에 습기가 촉촉하다. 낯선 모습의 아버지를 몰래 지켜보았던 설핏 두려웠던 밤, 아버지에게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밤이었다.   
   그 후, 아버지가 모시고 계셨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8남매의 형제들에게 할아버지의 임종을 알렸다. 상복을 차려입은 아버지는, 광대뼈도 툭 튀어나오고 눈은 움푹 들어가 더 초췌해보였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장례식을 치르던 날 밤, 큰아버지가 멀리서 문상을 왔다. 큰절을 올린 후 “아이고, 바빠서 봉투도 못 챙기고 그냥 왔네.”라고 하셨다. 그동안 모아둔 말들이 많았을 텐데, 아버지는 그 말을 믿으셨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바쁜 걸음을 재촉하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 큰아버지에게 “이거, 차비 해 가이소.” 하시며 아버지는 봉투를 건네주셨다.
   그것이 내가 큰 아버지를 본 마지막 기억이다. 며칠 밤을 잠 못 이루며 홀로 빈소를 지키셨다. 아버지의 등이 떨리는 것을 처음 보았다. 어디 이번뿐이겠는가. 장남도 아니면서 일찍이 8남매를 건사하며 생의 눈보라를 고스란히 맞으셨을 아버지의 어깨, 삭풍 속에 호된 겨울을 견디어냈을 아버지의 옹송그린 등은 또 얼마나 떨었을까.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삼일장을 치르는 동안 나는 아버지가 살아오신 인생을 다 보았다. 아버지의 탄식, 아버지의 눈물, 그리고 아버지의 깊이를 보았다. 
  장례식이 끝난 후, 아버지는 며칠을 앓아누우셨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고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가신 듯했다. 걱정이 되어 아버지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모로 누워계신 아버지에게 이불을 덮어드리고 다시 나오려는 순간, 아버지는 나지막한 소리로 내게 말씀하셨다.
  “내 딸~”
  “네, 아버지”
  “니가 내 딸이라서 참 좋다”
  상을 치르느라 지치고 까칠해진 아버지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흐른다. 결코 나약하지 않은 강직한 미소, 느닷없이 찾아오는 냉혹한 현실에도 끄떡없는 당신의 미소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수박을 쩍~갈랐다. 선명한 분홍빛으로 반짝였다.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울컥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아버지가 참아내야 했던 수박 여린 속 같은 당신의 마음을 이제야 알아서이다.

                                                                  <'이상렬의 수필 감상'에서 퍼온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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