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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야기

새벽 종소리/ 안나 이현실

by 안규수 2017. 1. 18.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의「새벽종을 치면서」를 읽고 있다. 선생의 생전 모습을 그려본다. 깡마른 얼굴에 선한 미소. 경북 안동 빌뱅이 언덕 토담집에 기거하면서 시골교회 종지기로 사셨던 권정생 선생님.

  은은히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많은 얼굴을 떠올린다고 했다. 불치병을 가진 아랫마을 아이의 건강과 혼자 사시는 할머니의 외로움을,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뒹굴고 독사의 굴에 어린이가 손을 넣어 장난치고 헤어짐도 죽음도 없는 그런 나라가 오기를!

  아득한 종소리의 시원始原을 따라가면 다가오는 그리운 얼굴이 있다. 우리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올해 96세의 이순자 권사님이다. 권사님은 젊은 시절부터 교회의 종소리만 들어도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 하셨다. 가부장적인 남편의 반대로 교회를 다니지 못하다가 남편이 세상을 뜨자마자 믿음 생활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했다. 첫닭이 울고 새벽 예배 준비를 알리는 첫 종을 치고 삼십 여분 후 시작을 알리는 재종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권사님은 참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셨다. 우리 친정어머니보다 십여 년은 더 연세가 많으실 것 같은데 언제나 내게 하소를 하셨다.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시기는 하셔도 한글을 모르시기에 구역예배 시간에 말씀을 나눌 때면 눈을 지그시 감고 온전히 열중하신 모습이 참 은혜스러웠다. 찬송가의 긴 가사를 정확하게 따라 부르고 몸을 옆으로 느릿느릿 흔들며 박자를 맞춰 부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선키나 앉은키나 거의 비슷해 보이던 꼬부랑 할머니 권사님.

  어느 해 보리쌀 두어 말을 이고 언덕을 오르다 돌멩이가 발부리에 걸리는 바람에 언덕을 데굴데굴 굴렀다고 한다. 그때 척추를 심하게 다쳤다. 생계마저 막연했던 지독한 궁핍으로 병원도 한 번 못 가보고 사경을 헤맸다. 겨우 몸을 추슬렀을 때 척추 측만증으로 허리는 거의 90⁰로 휘어졌다. 오십도 되기 전에 꼬부랑 할머니가 되신 것이다.

  집 근처 놀이터에서 열심히 운동하는 권사님을 종종 만나곤 했다. 오래 사는 게 죄라고 자는 듯이 죽는 복을 내려 달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분이 운동이라니,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구십오 세의 노령에 운동은 무슨 운동일까 싶었다. 인간이 가진 자기 생명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실상 나이와 상관없는 본능인가 생각했다. 권사님이 나를 보면 민망해할까 봐 내가 먼저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수년 동안 아들 옆에서 밤잠을 설치며 병시중을 드는 며느리에게 늙은 시어미마저 자리보전을 하고 드러눕는다면 차마 못 할 짓이라는 생각을 하신 것이다.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건강관리를 위해 하루에도 몇 바퀴씩 공원을 산책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권사님은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권사님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기도의 제목은 오로지 외아들 건강회복이었다.

  아들은 다니던 공장 현장에서 작업 중 선반에서 발을 헛디뎌 뇌를 크게 다쳤다. 어머니도 아내도 몰라보는 식물인간 되어 몇 년을 누워 지냈다. 의사는 회복할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고 노모는 새벽이면 교회로 달려와 하나님께 매달렸다. 몇 번의 뇌수술을 거치는 동안 가족은 지쳤고 노모의 심령에 불을 붙인 기도는외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더욱 뜨거워져 갔다. 오로지 자식을 살리겠다는 처절한 모성의 권사님. 늙은 자신을 대신 데려가 달라는 하나님 앞에 떼쓰듯 하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노모의 간절한 기도 응답이었을까. 병상에 누워 식물인간으로 끝낼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병시중 한 지 7년 만이었다. 아들은 어느 날부터 입속에 흘린 미음을 삼키기 시작했다. 두, 세 음절 대화를 띄엄띄엄 나누기도 하면서 부들부들 떨리는 두 다리로 아내를 부둥켜안고 한 걸음씩 발을 디뎠다. 권사님은 아들이 돌잡이 때 첫걸음을 뗄 때만큼이나 기뻤다고 했다.

  인간은 밥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에는 영혼이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 깊은 영혼의 교감을 이루었을 때 그 영혼은 풍요로워진다. 그것은 거대한 세상을 이기는 힘이 되기도 한다.

  권정생 선생은 어린 시절 누이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환상으로 만난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며 평생 믿음으로 살다 가신 거룩한 종지기이다.

  대에~앵 대에~앵 영혼을 깨우는 새벽 종소리를 평생 마음속에 새겨놓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새벽 기도를 다니던 권사님. 그 기도의 응답으로 아들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주님께 나가며 영혼의 소생을 이루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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