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저는 하노이에서 아침을 맞고 있습니다.
하노이는 일년중 가장 좋은 계절을 지나가고 있는 듯 합니다.
우리 기준으로는 형통이 무엇인가?
실패 안 하는 것,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 재수, 삼수 안 하는 것,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는 것 등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은 이런 것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형통은 이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형통한 것이 아니라
억울한 누명을 당하는 그 지점에서 하나님과 함께하심을 경험한다면, 그것이 형통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나눔 본문중에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하루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 아침에도 이찬수 목사님의 <세상에서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이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하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엄청난 규모의 금 신상을 만들어놓고 사람들에게 강제로 절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 문제로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고발을 당한다 (단 3:12).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금 신상에 절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것이 왕의 분노를 자아냈고, 결국 잡혀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지고 말았다.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에게 명령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라 하니라
그러자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단 3:20,21)
이 부분을 묵상하는데, 특히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라는 구절에
정말 중요한 영적 원리와 포인트가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문을 통해 깨달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가 경험해야 할 변화는 무엇일까?
우리가 만들어놓은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고정관념’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잘 변하지 않는 굳은 생각
또는 지나치게 당연한 것처럼 알려진 생각”인데, 신앙생활 하는 우리에게도 신앙적인 고정관념들이 많다.
요한복음 11장의 마르다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마르다의 오빠가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죽은 지 벌써 나흘이 되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죽은 오빠를 살려주겠다고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요 11:39)
여기에서 마르다가 가진 고정관념, 즉 마르다가 가지고 있던 ‘지나치게 당연한 것처럼 알려진 생각’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오빠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셔서 오빠의 병을 고쳐주셔야 한다, 죽으면 끝이다’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고정관념에 따라 설정된 데드라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오빠가 죽어버렸다.
이 고정관념이 너무 크다 보니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죽은 오빠를 살려주시겠다고 하셨을 때
“소용없는 일 하지 마세요. 우리 오빠가 죽은 지 벌써 나흘이나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이것이 마르다가 가진 고정관념이었다.
다니엘서 3장의 본문을 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과 그 결과로 그들이 정해놓은 데드라인이 무엇이었는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에 던져질 위기에는 처할지언정 던져지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는
그들이 기적적으로 건져지는 것이다. 그래야 그들이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은 그 선을 넘어버렸다.
그 세 사람은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지고 말았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절대, 더 이상 희망 없음’의 상태 아닌가?
그런데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런 인간적인 고정관념, 즉 인간의 개념으로 정해놓은 데드라인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인간적인 최악의 절망의 지점, 그 마지막 데드라인인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떨어지는
그 상황에서부터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될 때가 있다는 것이다.
혹시 본문을 오해해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일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본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에게 문제가 생길 때 이런 방식으로 일하시겠다는 기능적인 면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다.
본문의 초점은 ‘예수님 잘 믿으면 풀무불에 들어가도 죽지 않는다’는 식의 기능적인 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원리’를 깨우쳐주시기 위함에 있다. 본문에서 발견되는 삶의 원리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가 바벨론 같은 악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다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빠졌던 것 같은
좌절과 고난을 경험할 때가 있는데, 그때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라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할 때 우리의 한계 때문에 생겨버린 고정관념, 즉 ‘이제 다 끝났다, 완전한 절망이다,
오빠는 벌써 죽었다’ 같은 생각들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할 때, 데드라인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한계를 긋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 믿음을 지키다가 경험하는 고난은 오히려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가 가장 중요하다. 다니엘서를 더 읽어보면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 떨어졌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이 고난으로 인해 오히려 느부갓네살 왕의 인정을 받으며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닌가?
창세기 39장을 보면, 성경이 요셉을 묘사할 때 반복해서 사용하는 표현이 하나 나오는데, ‘형통’이란 단어이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 39:2)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 39:3)
…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 39:23)
흔히 요셉 하면 꿈이나 꿈의 사람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성경이 직접 묘사하는 요셉에 대한 이미지는 사실 ‘꿈’이라기보다 ‘형통’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이 요셉을 계속해서 ‘형통한 자’로 묘사하는데, 그 앞에 전제 하나를 꼭 붙여놓았다는 것이다. 어떤 전제인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창 39:2)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창 39: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창 39:23)
이 전제 다음에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가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형통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기준으로는 형통이 무엇인가?
실패 안 하는 것,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 재수, 삼수 안 하는 것,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는 것 등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은 이런 것들이다.
그러니 우리 기준에서 형통한 사람은, 남도 아닌 형제들에 의해 외국에 노예로 팔려가는 일 같은 것은 있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성추행범으로 몰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형통은 이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형통한 것이 아니라
억울한 누명을 당하는 그 지점에서 하나님과 함께하심을 경험한다면, 그것이 형통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위험한 불 근처에도 가지 않게 해주시고, 홍수 같은 위험도 다 막아주신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위험한 물 가운데로 지날 때, 불 가운데로 지날 때도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주님의 임재가 형통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다니엘서를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깨어짐으로 바벨론 같은 세상에서도
‘그 어디나 하늘나라’를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
정말 우리 삶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세상에서 믿는 자로 산다는 것. 이찬수 / 규장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 마태복음 1장 23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 이사야 43장 1, 2절
하나님, 우리의 고정된 시각이 많은 잘못된 생각들을 하게 함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관념으로 하나님을 단정짓고 판단하지 말게 하소서.
고난이 오히려 축복의 통로로 사용될 수 있음을 알게 하소서.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고 늘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막 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미국의 ‘고든콘웰 세계기독교연구센터’는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 10년간 무려 90만 명이 순교했고 약 6분마다 한 명씩 신앙을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순교의 정확한 기준에 대해서 약간의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신앙을 지키다,
혹은 복음을 전하다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인권을 위한 기구 ‘오픈 도어스’의 조사에 따르면
1년간 공식적으로 신앙을 이유로 사형을 당한 기독교인들은 1,200명 정도라고 합니다.
사형을 집행한 기관에서 ‘신앙’이 사형의 이유라고 공식적으로 밝힌 경우이며
정확한 집계가 어려운 북한이나 중동의 여러 나라를 제외했음에도 매우 높은 숫자입니다.
세계적으로 점점 박해가 줄고 있다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지난 3,4년간은 오히려 기독교인들을 향한 박해가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2016년도는 조사 이래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고, 어디에나 교회가 있고, 기독교인이 넘치는 우리나라지만
여전히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다, 또 믿음을 지키다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선교라는 성도의 본분을 잃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와 물질로 선교를 협력하십시오. 아멘!!
주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잊지 않고 중보하게 하소서.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님들을 위해 중보하고 정기적으로 후원합시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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