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오늘도 새 하늘, 새 바람, 새 호흡, 새 힘, 새 기쁨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0^
하나님이 세운 사람을 내 손으로 죽이지 않겠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다윗은 원수를 죽이고자 하는 본능을 무서울 정도로 제어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무서운 절제를 보여주었던 다윗이지만,
교만해져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둔감해지자
목욕하는 여자를 보고 생겨나는 충동 하나를 절제하지 못해서
수치의 자리로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이 두 인물이 같은 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통제하게 하는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제 스스로를 통제하기에 역부족입니다.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성령님이 주시는 절제를 열매 맺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예리한 칼을 구하기 전에
이 예리한 칼이 저를 베지 못하도록 성령의 칼집을 구합니다! (오늘의 나눔 본문 중에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멋진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 아침은 이찬수 목사님의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꼭 장만해야 하는 칼집을 ‘절제’라고 설명하는데, 절제는 영어로 ‘셀프컨트롤’(self-control)이다.
선 없이 TV를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리모트 컨트롤이고,
내가 나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힘이 셀프컨트롤이다.
내가 담임목사가 되어 보니, 우리 교회 부교역자들을 컨트롤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어지간하면 담임목사의 말에 순종하려는 고마운 교역자들이 많아서 뭐라고 이야기하면 그래도 지키려고 애쓴다.
그런데 진짜 컨트롤하기 힘든 것은 나 자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하고 또 구해야 할 덕목이 절제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 반드시 장착해야 할 소중한 덕목인 ‘절제’는 성령의 열매라는 사실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갈 5:22,23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중에서 맨 끝에 나오는 ‘절제’라는 열매를 갖추지 못한다면
앞에서 맺은 나머지 여덟 가지 열매를 다 쏟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나는 그 아름다운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이 모든 것을 담는 그릇이 ‘절제’라고 생각한다.
갈라디아서 5장을 기록하던 당시 가장 중요한 윤리 덕목 중에 하나가 ‘절제’였다.
바울이 참 귀한 것이, 모든 사람이 절제를 아주 귀하게 여기던 그 시대에 이것을 영적인 문제로 가지고 와서
이 절제는 우리가 노력하고 몸부림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성령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구약의 다윗이 이것을 증명해주는 인물이다.
다윗이 성령 충만할 때, 다른 말로 성령님에 의해 통제가 이루어질 때 일어난 일이다.
동굴에 숨어 있던 다윗에게 원수 사울의 목을 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 상황에서 다윗에게 믿기지 않는 셀프컨트롤이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세운 사람을 내 손으로 죽이지 않겠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다윗은 원수를 죽이고자 하는 본능을 무서울 정도로 제어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무서운 절제를 보여주었던 다윗이지만,
교만해져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둔감해지자
목욕하는 여자를 보고 생겨나는 충동 하나를 절제하지 못해서 수치의 자리로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이 두 인물이 같은 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통제하게 하는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제 스스로를 통제하기에 역부족입니다.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성령님이 주시는 절제를 열매 맺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예리한 칼을 구하기 전에 이 예리한 칼이 저를 베지 못하도록 성령의 칼집을 구합니다!”
날마다 이런 간절한 기도를 드림으로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게 되기 바란다.
앞에서 언급한 히브리서 12장 2절을 다시 보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히 12:2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어떤 부분을 바라보라고 하는가?
십자가를 참으시는 예수를 보라고 한다.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또 수치스러운 십자가이지만,
장차 이루어질 그 놀라운 영광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참아내신 주님, 그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 예수님을 바라볼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이 십자가의 능력을 허락하셔서 우리도 인내할 수 있게 도와주신다.
예리한 칼날이 나를 베지 못하도록 지켜주신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실제적인 능력이 되기를 바란다.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이찬수 / 규장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갈라디아서 5장 22~24절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 디모데전서 4장 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 에베소서 5장 18절
주님이 제 안에 계시지 않을 때 제멋대로 하려는 무질서가 저를 사로잡습니다.
늘 주님을 생각하며 성령 충만함으로 마음을 지켜주옵소서.
내 안의 성령의 열매가 저와 주변사람들에게 나눠지길 소원합니다.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고후 5: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영국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는 큰 고민에 빠져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너무나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지만 결혼을 해야할지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허버트는 결국 동전을 던져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앞면이 나오면 결혼을 하고 뒷면이 나오면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은 허버트에게
사랑이 진심임을 알았던 친구들은 동전을 던지지 말고 고백을 하라고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의 권유에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허버트는 결국 동전을 던졌습니다.
동전은 뒷면이 나왔고 허버트는 그녀와 헤어졌습니다.
허버트는 ‘사회학의 창시자’라고 불릴만큼 머리가 좋고 인정받는 학자였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질 결정을 끝까지 내리지 못했고 어이없게도 동전던지기로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재임시절 책상 앞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놨습니다.
“모든 책임은 이 자리에서 끝이 난다.”
선택에는 성공과 실패라는 결과가 따라오기에 때로는 두렵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길이라도 걸어가야 다시 돌아올 수 있고 바른 길을 알 수 있습니다.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성령님을 통해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따라 바른 선택을 하십시오. 아멘!!
주님! 세상을 두려워않고 믿음대로 행동할 용기를 주소서.
주님이 주신 자리에서 내가 맡은 바 책임을 집시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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