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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편지

내가 누구인지 오, 하나님 당신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by 안규수 2021. 2. 18.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오늘도 새 날, 새 하늘, 새 호흡, 새 힘, 새 노래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0^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대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내 안에 확고한 대답이 없으면,

유실된 포탄을 주워 들고

무엇인지 몰라 신기해서 여기저기 두드려 보며

노는 아이들의 무모함처럼 위험합니다.

그런 인생은 목적지도 모르고 떠나는 항해처럼

파란만장하고 정처 없을 것입니다.

의미도 없고,

날마다 혼돈만 겪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도

깔끔하게 자신을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나눔 본문 중에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멋진 하루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 아침은 조동천 목사님의 <내 인생을 변화시킨 세가지 질문> 이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먀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파트1. 나는 누구인가? <흔들리는 정체성을 붙잡으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인생의 세 가지 도전 중 첫 번째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은 시험 중 첫 번째 시험이 이 질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질문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나머지 두 질문을 결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그 답을 찾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1944년 7월 16일,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님이 감옥에서 쓴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이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걸어 나올 때 마치 영주가 자기 성에서 나오 듯

침착하고, 활기차고, 당당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종종 말하기를 내가 간수에게

말을 건넬 때 마치 내가 명령하는 사람인 양

자유롭고, 다정하고, 분명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또 말하기를 마치 내가 승리에

익숙한 사람인 양 불행한 나날을 견디면서

평화롭고,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다고 한다.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이 말하는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나는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런 사람에 불과한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게 뭔가를 갈망하다가 병들고

목이 졸린 사람처럼 숨 가쁘게 몸부림치고

빛깔과 꽃과 새소리를 그리워하고

친절한 말과 인간다운 친근함을 그리워하고

사소한 모독에도 분노에 떨며

 

대사면을 간절히 기대하고

멀리 떨어진 친구를 그리워하다 낙심하며

슬퍼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글 쓰는 일에 지쳐 허탈에 빠지며 의기소침하며

모든 것과 작별하려는 그런 존재

 

나는 누구인가?

전자인가 후자인가?

오늘은 이런 인간이고 내일은 다른 인간인가?

타인 앞에서는 경멸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약자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누구인지

오, 하나님 당신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본회퍼 목사님처럼 자신의 사명에 확고한 하나님의 사람조차 내가 누구인지 고뇌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와 자신이 느끼는 현실의 자아가 일치하지 않을 때,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고독한 물음을 하게 되고 그때마다 혼란을 겪게 됩니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소설 중에 나오는 인물인 시드니 카트니는 늘 독주(毒酒)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는 거울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이는 자아의 정체성을 깨뜨리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백설공주의 계모 왕비는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며 누가 가장 아름답냐고 묻고 또 묻습니다.

그러나 매번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끊임없이 순간순간 드러나는 낯선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며

'이게 아니야' 하면서 거울을 깨뜨리듯이 무너뜨리고 또 무너뜨립니다.

 

철학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이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고대의 철학자들이 우주적 담론을 펼치고 있을 때, 소크라테스는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기록된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를 화두로 꺼냄으로써 철학의 방향을 틀어 놓았습니다.

노자는 “남을 아는 사람은 현명하고 자기자신을 아는 사람은 덕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적 감각으로 쉽게 쓴 철학책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소피의 세계》에서도

“너는 누구냐”라고 적힌 한 장의 편지가 한 소녀에게 전달됨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고대든 현대든 시대를 막론하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로 철학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사로운 봄날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가 깊은 생각에 잠겨 길을 걷다가 앞에서 오는 사람과 부딪쳤습니다.

앞에서 오던 사람이 화가 나서 “도대체 당신 누구요? 앞이나 똑똑히 보고 다니시오” 하며 짜증을 냈습니다.

그때 쇼펜하우어가 대답했습니다.

 

“글쎄 말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도 모릅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생애를 22년 동안 연구해서 그의 전기를 쓴 사람이 칼 샌드버그(Carl Sandburg)입니다.

샌드버그는 이로 인해 전 세계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 그에게 물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을 연구하느라 그동안 참 수고가 많았네. 그런데 여보게, 이제부터는 무엇을 할텐가?”

 

샌드버그는 진지하게 대답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샌드버그란 어떤 인간인가를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네."

 

우리는 남을 알기 위해서는 시간과 정성을 수 없이 투자하면서

정작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신중하게 시간과 정성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런 탓에 사탄의 유혹을 받으면 쉽게 넘어져 멋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사탄의 간교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도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잡혀 먹기 위해 부지런히 먹고 살찌는 돼지처럼 생각 없이 사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던지신 질문도 이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범죄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가장 먼저 던지신 질문입니다.

자기의 자리를 망각하고, 자아를 잃어버린 인간은 마땅히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마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대신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대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내 안에 확고한 대답이 없으면, 유실된 포탄을 주워 들고

무엇인지 몰라 신기해서 여기저기 두드려 보며 노는 아이들의 무모함처럼 위험합니다.

그런 인생은 목적지도 모르고 떠나는 항해처럼 파란만장하고 정처 없을 것입니다.

의미도 없고, 날마다 혼돈만 겪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도 깔끔하게 자신을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읽을 말씀 : 전도서 8:9-17

 

영국 오컴 출신인 논리학자 윌리엄은 “논리적으로 가장 단순한 것이 진실일 확률이 높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느 날 집 앞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이 나무가 우연히 바람에 날아와 집 앞에 심겨졌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누군가 자는 동안 나무를 옮겨놨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이 논리는 많은 학자들이 인용하며 ‘오컴의 면도날’로 불리는데

최근에는 무신론자들이 기독교를 공격할 때 많이 사용합니다.

기독교적 논리로 창조와 세상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물리학과 진화론이 더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오컴의 면도날에 따르면 우리는 스마트폰보다는 전화만 되는 무전기를,

복잡하고 아름다운 명화보다는 단순한 만화를 선택해야 합니다.

게다가 세상에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진리는 확률이 아닌 확신이어야 합니다.

같은 사건을 봐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시각이 달라지듯이

진리를 보고도 착각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모순된 세상의 이론에 빠지지 마십시오. 아멘!!

 

주님!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통해 주님을 알아가게 하소서.

세상의 잘못된 이론과 사상에 미혹되지 맙시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