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오늘도 새 날, 새 하늘, 새 호흡, 새 힘, 새 노래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0^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서
나라 잃은 서러움을 탄식하며
메시아의 나타남을 고대하며 살았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메시아란
자기들을 구원할 만큼 비범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그날도 사람들은 메시아를 고대하며
성전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때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 놓고
이렇게 속삭였을 지도 모릅니다.
“시대가 영웅을 기다린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천사들의 경배를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물도, 불도, 중력도 해치지 못하는 존재임을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떤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별한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들에 게 인정받는 스타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적의 사도처럼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예수를 믿음으로써 특별한 삶을 사는 우리를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알아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특별함은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위기와 고난을 만나고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오늘의 나눔 본문 중에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멋진 하루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 아침은 조동천 목사님의 <내 인생을 변화시킨 세가지 질문> 이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두번째 질문.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누구냐?' 라는 존재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면
이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삶의 태도 문제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누구인가' 라는 존재 의식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더욱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정체성이란 말씀에 근거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소유나 경제력이나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서
나라 잃은 서러움을 탄식하며 메시아의 나타남을 고대하며 살았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메시아란 자기들을 구원할 만큼 비범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그날도 사람들은 메시아를 고대하며 성전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때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 놓고 이렇게 속삭였을 지도 모릅니다.
“시대가 영웅을 기다린다." (중략)
때로 우리는 슈퍼맨이 기다려지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하고,
배트맨이라도 되고 싶은 울분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군중들은 이런 기대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유대 민족을 하나님의 초능력으로 단번에 구원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기대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어떻게 살기로 결정하셨을까요?
사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나는 누구인가'가 결정합니다.
지그 지글러(Zig Ziglar)가 쓴 《정상에서 만납시다》에는
17년 동안 지적장애인처럼 살았던 한 천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빅터 세리브리아코프는 열다섯 살 때 어느 선생님께 충적격인 소리를 듣습니다.
"너 같은 지적 장애인은 공부해도 소용없어! 장사나 하는 것이 낫다."
이 말을 듣고 그는 17년 동안이나 자신이 지적 장애인인 줄 알고 지적장애인 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32세 때 우연히 하게 된 IQ 검사에서 161 이라는 경이적인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지적 장애인이 아니라 천재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책을 썼고, 특허를 냈고, 기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IQ 132 이상만 가입할 수 있는 멘사(mensa) 클럽의 명예회장까지 지냈습니다.
자신을 지적 장애인으로 인식하면 사실과 상관없이 지적 장애인으로 살게 됩니다.
반대로 천재로 인식하면 천재로 살게 됩니다.
이처럼 '정체성'은 철저하게 삶의 태도'를 지배합니다.
'김또깡'이라 불리던 김두환은 원래 거지였고, 자타가 공인하는 깡패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두환은 자신이 청산리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할 일 없이 깡패로 전전하던 그가 장군의 아들다운 품위와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찰스 스윈돌(Charles Swindoll)이 말한 대로 인생에서 삶의 태도(attitude)가 중요하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정체성 인식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내가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은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삶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회적 신분과 그 신분에 걸맞은
삶의 태도나 행동 규범을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규정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누가 말하지 않아도 거지는 지저분하게 살고,
대기업의 회장은 떵떵거리고,
정치인은 권모술수에 능해야 하는 것처럼 신분에 따른 삶의 양태가 정해져 있습니다.
세상의 권세 잡은 자인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은 어떠해야 한다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예수님을 압박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멋진 영웅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규정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과 전혀 다른 질서 속에서 살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어느 시각장애인이 나옵니다.
그는 몸이 불편한 것은 고사하고 마음고생이 아주 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면서 시각장애인이 된 것을 그 부모나 본인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시각장애인도 사람들의 놀림을 받아도 항변하지 못했고
아무데도 쓸데없는 죄인으로 동냥이나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그에 관하여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가 나면서 시각장애인이 된 것은 그 자신 때문인지,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인 지를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이 그랬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자신이 죄 인도 거지도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값진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칭 의인이라 으시대는 바리새인들에게
출회를 당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당당하게 예수를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아냥거림을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그가
어느 순간 급변해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정체성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이 바뀌면 삶의태도(양식)도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으면
세상 사람들의 잘못된 평가와 기준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가장 용감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뀝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세상이 암묵적으로 강요한 자기 정체성과 그에 따른 삶의 태도 때문에 눌려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비굴하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하나님의 자녀답지 않게
세상이 정해 준 정체성에 따라 자신의 한계를 정해 놓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장군의 아들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남들이 다 거지라고 손가락질해도 왕자처럼 품위 있게 행동하십시오.
남들이 다 공주님이라고 떠받들더라도 마치 하녀처럼 겸비하십시오.
물론 그랬을 때 출교당한 시각장애인처럼 왕따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당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첫 번째 시험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말씀에 근거해서 확고히 갖고 있음을 알았습니다(1-4절).
마귀는 정체성의 문제로 예수님을 흔들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정체성에 걸맞지 않은 삶의 방식을 주입함으로써 예수님을 흔들기로 작정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마 6:6
마귀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과연 무슨 의도로 이렇게 말한 걸까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마귀 자신이 규정하려는 의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연의 법칙을 초월할 수 있지 않느냐,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특별한 보호를 해주지 못하겠느냐는 것이 마귀가 규정한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입니다.
더구나 그날은 명절이라 수많은 무리가 모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초월의 힘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아들로 화려하게 데뷔하라고 부추긴 것입니다.
마귀의 요구가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천사들의 경배를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물도, 불도, 중력도 해치지 못하는 존재임을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떤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별한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들에 게 인정받는 스타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적의 사도처럼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예수를 믿음으로써 특별한 삶을 사는 우리를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알아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특별함은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위기와 고난을 만나고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마 4:7
사탄의 부추김에 예수님은 이렇게 일갈하셨습니다.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삶의 방식이
불경죄에 해당할 정도로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읽을 말씀 : 마태복음 16:21-28
19세기 초반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됐다는 소문을 듣고 전국의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를 찾았습니다.
광산지대로 알려진 곳을 남들보다 하루라도 빨리 찾기 위해서 사람들은 지름길을 찾아 헤맸는데
그중에 최단 거리로 갈 수 있는 곳은 애리조나주에 있는 척박한 사막이었습니다.
가는 길에 물도 없고 먹을 곳도 없고, 마을도 없는 황무지였지만
사람들은 황금을 조금이라도 빨리 캐기 위해 그 사막을 지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막을 지나다 목숨을 잃었지만 그래도 황금을 향한 발걸음은 줄지 않았습니다.
목이 말라 죽고, 길을 헤매다 죽고, 뜨거운 태양 아래 목숨을 잃어도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 ‘죽음의 골짜기’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황금을 쫓아 생명을 버리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도 이 시대의 다른 ‘황금’을 쫓다
목숨을 버리는 똑같은 어리석은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주시는 주님을 떠나
황량한 사막으로 황금을 찾으러 떠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가장 귀한 생명을 버리면서 물질을 쫓는 삶을 이제는 끊어버리고
거룩한 것을 위해, 주님을 위해 귀한 땀을 흘리며 살아가십시오. 아멘!!
주님! 눈앞의 탐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지켜주소서.
육을 위한 일보다 영을 위한 일에 더욱 힘을 냅시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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